소외받은 사람들의 로맨스 ─『아멜리에』

 

 

안도현 시인의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세상에게 이기지 못하고 / 너는 섬으로 가고 싶겠지 / 한 며칠, 하면서 / 짐을 꾸려 떠나고 싶겠지 / 혼자서 훌쩍, 하면서라는 구절이다. 이 시의 화자처럼 나도 떠나고 싶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별거 아닌 일들이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엔 일들이 파도처럼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조차 고통이었다. 흐름에 깎이는 백사장처럼, 휩쓸리며 사라져 버리고 싶기도 했다.

 

내가 아멜리에를 접한 건 고등학교 3학년 제2외국어 시간에서였다. 선생님이 힘드실 때 마다 보곤 하는 영화라고 말씀 하시면서 틀어주셨던 영화는 잔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백사장을 간질이곤 하는 맑은 날의 파도 같았다. 영화의 주인공은 보잘 것 없으며’, ‘정상에서 빗겨난사람들이다. 아멜리의 아버지는 부인을 잃고 폐쇄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 영향으로 아멜리 또한 공상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서 발을 디디지 못하고 갈등한다.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 또한 현실 부적응자에 가깝다. 즉석 증명 사진기에서 잘못 나와 찢어 버린 사진들을 스크랩하는 게 취미인 니노는 어렸을 적 집단 따돌림을 당한 경험이 있다. 아멜리에와 니노는 찢긴 사진 같은 사람들이다. 어딘가 결함이 있고, 그 결함 때문에 타인에게 쉽게 다가가기 어려워, 자신의 취미나 공상으로 도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아멜리에라는 영화는 소외받은 주인공들의 로맨스를 통해 잔잔함에 대한 미학과 사랑에 대한 의미를 전달한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은 파도처럼 거세게 밀려오는 힘든 일들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차분하다. 아무리 창 밖에서 비바람이 세게 분다고 해도,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쉬이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영화는 파리의 풍경을 담으며 잔잔하게 진행된다. 시간을 들여 파리의 풍경을 묘사하고, 사람들을 묘사한다. 아멜리의 출생부터, 그녀의 가족들과 좁은 인간관계를 해설자의 입으로 천천히 말해준다. 러닝타임의 삼분의 일을 아멜리의 인생에 할애하면서, 관객이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물들어가게 한다. 남자 주인공과 처음 마주치고 나서도 그녀의 인생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격류가 치는 것은, 오히려 그가 소중한 물건을 떨어트리고 나서 부터다.

영화는 그녀를 마치 깊은 곳에 고이는 물과 같이 묘사한다. 파리 속에서 살아가는 그녀는 나름대로의 기준과 줏대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는다. 자신이 반한남자주인공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한다. 급하기만 한 현대 사회에서 그녀가 살아가는 모든 움직임들은 파리라는 도시를 낭만적으로 만듦과 동시에, 관객에게 여유를 선사한다.

처음 아멜리에를 봤을 때 가장 감동했던 점은, 극의 템포가 느리다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은 모든 부분에서 여유가 부족한 시간이다. 책을 읽을 시간도 부족했고, 스트레스를 풀 시간도 부족했다. 당시 내 소원은 누군가가 날 납치해서 일주일 만 도서관에 감금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입시라는 건 거대한 폭포와도 같아서, 잘못 하면 급류를 타고 낭떠러지로 떨어져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았다.

그 때 접한 아멜리에는 나에게 느려도 괜찮아.’ 라고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설레임에 가득 차 빠르게 진행 될 것 같은 연애조차도 숨바꼭질을 해 가며 만남을 지연하는 그 느린 템포가, 스토리를 진행하는 것 보다 아멜리가 살아가는 파리의 정경을 보여주는 카메라 워크가 위안으로 찾아왔다. 그 때 처음, 느려도 괜찮다는 걸 알았다. 한낱 로맨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느림을 새삼스럽게 재인식 했던 것이다.

또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조곤조곤하게 이야기해주는 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작가 지망생으로서 앞으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고민할 때 길을 알려줬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림을 다시 안 것처럼, 나는 내가 쓰게 될 글이 느린 방향으로 다가가도 괜찮을 거란 걸 알게 되었다. 빠르게 달려가며 스스로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에게 내 글이 천천히 스며들듯, 마치 아멜리에처럼 다가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들은 여러 가지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 시험지 위의 다섯 개 보기 중 하나를 고르는 방식은 아니다. 왜냐하면 시험지와는 달리 선택지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연한 걸 놓치고 있을 때가 많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혹은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등의 책이 유행하는 것은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답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멜리에는 로맨스 가득한 스토리를 통해서 느릴 수도 있다는 선택지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가끔씩 남들에게 떠밀려 거세게 흔들릴 때 이 영화를 보면 마음이 진정되면서 내 을 찾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찬 파도에 밀려온 모래더미에 가려진 여유로움이라는 선택지를 다시 찾아주곤 한다. 안도현 시인의 에서 나오는 것처럼 세상에 이기지 못하고 떠나고 싶을 때, 섬이 되어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겨울이다. 길에는 눈이 얼어 있고, 하늘은 당장이라도 울 것 처럼 어둡다. 마음에 여유가 없기 쉬운 계절이다. 얼어붙은 볼처럼 마음에도 살얼음이 끼고, 그것이 올 겨울동안 절대로 녹지 않을 것 같은 아스팔트 위의 만년설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몰린 느낌이 든다면, 그렇다면, 단 두 시간 정도를 투자해서 아멜리에를 보는 건 어떨까. 소외받은 사람들의 느긋한 로맨스가 어쩌면 잃어버린 여유느림이라는 선택지를 찾아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혼자서 훌쩍, 하고 떠나고 싶은 날 옆에 가만히 다가오는 섬이 될 것이며, 당신 마음의 '봄'이 될 것이다.

 

하진 『전쟁쓰레기』 서평

 

 

19506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크게 번져 다른 여러 나라들까지도 참전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북한과 소련을 도와 중국군을 보냈다. 전쟁쓰레기의 주인공 유안은 황푸군관학교의 학생 군으로 편성되었다.

유안은 중국인으로서 유별난 점은 없다. 당에 집착한다거나, 큰 임무를 맡아 인정받기보단 고향으로 돌아가 약혼녀와 결혼을 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지내는 것이 그의 꿈이다. 하지만 그가 포로로 잡히면서 그의 꿈은 멀어지게 된다.

전쟁 초반, 중국군들은 모두 자신들이 승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당의 간부들은 그것을 오히려 부추겼다. 그리고 뒤로는 포로들을 학대했다. 포로는 죄인이다. 그들은 모든 군인들에게 포로가 될 바엔 자살을 하라고 부추겼다. 그리고 그들이 포로로 돌아오면 심문을 했다. 군인이 아닌 사람들은 당이 이렇게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당의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유안과 함께 포로로 잡힌 페이 인민위원이라는 사람도 심문을 피할 순 없었다. 당을 믿으며 포로수용소에서 살기위한 반항을 했던 이들은 모두 포로라는 이유로 배신을 당했다.

전쟁이 미군과 남한의 승리로 기울자 사람들은 점점 위기감을 느꼈다. 당에 대한 의심은 아니었지만 포로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포로수용소에서 특히 더 두드러졌다.

나는 운이 좋았다. 나는 당원이 아니었고, 약속을 위반하지도 않았으며, 황푸군관학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국민당 애호자들을 따라 타이완에 가지도 않았다

유안은 포로수용소에서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많은 유혹을 받았다. 타이완에서 일거리를 주선해주겠다, 혹은 자신의 딸과 만나게 해주겠다. 황푸군관학교는 지금 사립 유명 대학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식인을 자처하는 황푸군관학교 출신 포로들은 대부분이 이 유혹에 넘어갔고 곧 타이완으로 넘어갔다.

FUCK USA. 유안의 몸에는 문신이 박혀있다. 처음엔 USA가 아니라 중국을 뜻하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유안이 누군가에 맞고 쓰러진 사이에 해놓은 일이었다. 유안은 이를 지우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지워지지 않고 중국을 뜻하는 글자만, 미국으로 바뀌었다.

유안은 한국전쟁포로로서 상당히 만은 변화를 겪었다. 중국군으로서 당에 봉사도 했고 국민당 애호가들과 함께 지내기도 했으며 타이완으로 넘어갈 수 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전쟁 후반, 돌아온 포로들은 모두 침울해져 있고 패전 소식에 많은 이들이 심문이라는 이름하에 죽어갔다. 하지만 포로들의 처분에 관해서는 전부 묻혔다 할 만큼 중국은 반응이 없었다. 이렇다 할 문제도 없이, 전쟁은 수습되어갔다.

대부분의 전쟁소설은 한 명의 영웅이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풀어간다. 하지만 전쟁쓰레기는 그렇지 않다. 평범하게 자라온 사람 하나가 군인이 되어 전쟁을 겪는 이야기는 흔한 것이 아니다 또 한국 전쟁을 한국 군인이 아닌 다른 나라의 군인이 주인공이란 점도 다르다.

전쟁은 피해자를 만든다. 가해자도 결국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일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에 사람을 죽이고 전쟁이 끝나면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것은 가해자인 국가도, 피해자인 국가도 다르지 않다. 몇 개의 땅은 사람들에게 기피 대상이 되고 황폐화 되며 전쟁에서 진 국가는 그 책임을 지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한다.

전쟁쓰레기는 그런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 않다. 전쟁을 겪는 국가는 국가 대로 책임을 지겠지만, 개인은 다르다. 그 나라의 국가와 국민은 결국엔 분리되어야 한다. 유안은 딱히 아무런 짓을 하지 않았다. 전쟁에 나가고, 포로가 되고 그 벌로 감시를 받으며 살아가고, 결혼하고, 손녀가 자라는 것을 보며 한국 전쟁에 대한 것을 잊었다 싶을 만큼 편안하게 지냈다.

전쟁은 분명 국가 간의 일이지만 개인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개인이 전쟁을 겪고 나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개인의 문제다. 유안보다 못한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고 유안보다 훌륭한 일을 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국가가 개입하여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전쟁에 대한 것은 개개인이 알아서 판단해야 한다, 전쟁쓰레기는 그런 점을 매우 잘 보여 주는 책이다.

황천길 한 갑 주세요, 뭔가 찝찝하잖아

 

 

 

500원에 사먹고 있는 음료수는 원가가 100원을 넘지 않는다. 나머지는 유통 값과 소매상들의 이윤, 그리고 세금이다. 유통 값과 이윤을 빼고 나면 얼마 남지 않으니 세금도 크게 붙어있지 않다. 그에 비해 담배는 값의 62%를 세금으로 걷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201611일부터 담뱃값을 2000원 더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2006년 노무현 정부시절, 500원 인상에 대하여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소주와 담배는 서민이 애용하는 것 아닌가. 국민이 절망하고 있다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당선 후 일 년 반 만에 그 말을 바꿨다.

흡연율을 줄이기 위한 정책. 담뱃값 인상에 대해 정부가 내세운 이유다. 하지만 복지부에서 발표한 설문조사는 흡연율을 줄인다는 이유의 근거가 되지 못했다. 금연자들의 대부분이 자신의 건강, 혹은 가족의 건강을 위해 금연을 했다고 답했다. 담뱃값이 올랐기 때문에 금연을 시작했다는 것은 아니다. 담뱃값이 오르면 흡연율이 줄어든다는 결과는 어디서 도출된 결과인가.

담뱃값이 인상되어도 결국 피울 사람은 피운다. 피우는 양이 적은 사람들은 4500원이 되어도 큰 부담이 없으니 양을 줄이지도 않고 늘 피우던 데로 피울 것이다. 그리고 많이 피우던 사람들도 처음엔 금연을 해보겠다고 하나 나중엔 4500원이라는 금액에 익숙해질 것이다.

현재 담뱃값의 916원은 지방세로 쓰인다. 담배를 피울수록 세금이 증가해서 인구수가 적은 곳에서는 담배의 세금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 국민의 건강을 위해 인상한 돈이 결국 지방세가 되어서 오히려 더 사서 피워야 지방 살림이 좋아지는 진다. 따라서 국민 전체가 금연하면, 오히려 국가의 재정이 위험해 진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국민의 건강 증진이란 표어를 걸고 담뱃값을 인상한 정부를 신뢰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담배 갑은 다른 나라의 담배 갑보다 멋있어 보인다. 그래서 중고생들은 멋으로 피우기도 한다. 다른 나라의 담배 갑은 정부에서 디자인을 하고 있다. 그래선지 담배로 생기는 병들로 죽어간 사람들의 사진을 모자이크나 흐림 효과 없이 담배 갑에 새겨 넣었다.

어느 네티즌이 이런 댓글을 남긴 적이 있다. ‘담배 이름이 너무 예쁘다. 타임. 에쎄, 레종. 클라우드이런 감성적인 이름 말고 폐암말기, 황천길, 호흡곤란, 뭐 이런 자극적인 이름을 써야 경각심이 생기지. 슈퍼에서 폐암말기 한 갑주세요뭔가 찝찝하잖아웃음이 터지지만 맞는 말이다.

미국에서는 편의점에서 담배판매를 중지한다고 한다. 미국 담뱃값은 20142월 기준 4.35달러다. 거기다 지금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담뱃값으로 인한 수익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상당히 높을거라고 예상한다.

OECD 국가 중 한국은 최저의 요금으로 담배를 살 수 있다. 청소년들의 접근성도 쉽다. 청소년들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담배를 산 것에 대해 벌을 받지 않는다. 판매자가 벌을 받을 뿐이다. 벌을 받지 않으니 청소년들의 접근이 쉽다. 다른 나라의 경우 판매자가 아닌 청소년 본인, 혹은 부모가 벌을 받는다. 일본의 경우엔 성인 인증을 판매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스스로 성인인증을 한다. 내가 담배를 살 수 있는 나이라는 것을 자기가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정부는 국민의 건강증진을 위해서 담뱃값을 인상한다고 했다. 하지만 서민의 애용품이라하여 500원 인상조차 성명서까지 내며 반대했던 이들이 내건 건강증진은 그냥 세금을 더 걷겠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정부가 정말 국민건강을 위했더라면 미국처럼 접근성을 줄인 후에 했어야 옳다. 미국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우리나라만의 방법을 찾아도 됐을 것이다. 다른 나라의 성공한 정책이 있는데 우리는 우리만의 정책을 만들지 않고 그저 옛날에 실패한 정책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네티즌의 말은 솔직히 허황된 것이다. 담배의 이름은 담배회사에서 정하는 것이니 수익을 올리려면 그런 멋에서라도 기대야한다. 하지만 정부가 건강증진이라는 표어를 내걸며 담뱃값을 올린 이상, 그런 허황된 말에서 구체적인 방안을 찾아야 한다. 적어도 너무 많은 디자인을 내걸며 청소년이나 보통 사람들에게 멋있어 보이게 끔은 만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김려령 『너를 봤어』 서평

  

 

 

김려령 너를 봤어서평

 

    어느 시대의 어떤 사회에서든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계속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간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살아간다. 이것은 어떤 식으로든 타인과 관계를 맺고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것은 죄의식으로 남지만, 다들 숨기거나 모른 척 하려고 애를 쓴다. 특히 현대에 와서 그런 경향은 심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프다. 김려령 작가는 바로 이러한 점에 눈을 둔다.

   김려령 작가를 알게 되었던 완득이라는 작품도 위와 같은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완득이에 등장하는 완득이의 아버지와 어머니, 완득이 등 많은 인물들이 모두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만 완득이는 많은 상처 중에서도 청소년의 현재 진행형 상처가 중심인 이야기이다.

   이에 비해 너를 봤어는 청소년의 시기를 지난 성인들의 이야기다. 역시 이 인물들도 각자의 상처가 있는 인물들이다. 상처 중에는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어온 것들도 있는데, 주인공인 정수현과 그의 아내가 가진 상처가 그렇다. 둘의 결혼은 처음부터 또 다른 상처를 만들게 될 것이라고 예견되어 있었다. 서로에 대한 사랑도 별로 없었을 뿐 아니라 둘의 상처가 컸다. 아내는 어렸을 때 집안과 관련된 상처를 겪어오면서 날카로워졌다. 또한 수현은 어릴 적 폭력을 겪어 마음 속에 상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해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밝혀지지 않아 수현의 마음속에 계속 자리 잡고 있게 되었다. , 상처와 죄의식 두 가지를 항상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연령대가 다르지만 완득이너를 봤어의 상처에는 닮은 부분도 있다. 그것은 둘 다 가족과 관련된 상처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상처들이 여러 사회문제들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도 닮은 부분 중 하나이다. 완득이는 다문화 가정 문제와, 너를 봤어는 가정 폭력과 접점이 있다. , 작가는 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라고 부르는 가족과 연관된 사회문제를 주로 다룬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사회의 가장 밑에 깔려 있는 상처에 관심을 두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너를 봤어를 읽을 때는 인물들의 상처를 살피는 것도 좋지만 문장에 신경을 쓰면서 읽는 것도 해볼 만하다. 이 책을 이루고 있는 문장들은 책의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등장인물과 닮은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화자는 주인공인 정수현이지만 자살한 아내의 환영을 그가 보고 있을 때나, 아내의 과거를 말할 때는 날이 서있으면서도 동시에 고요했던 아내의 분위기와 닮은 문장을 내뱉는다. 마치 아내의 혼에 홀려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아내보다 늦게 찾아온 첫사랑이라고 한 영재에 대해 말할 때는 영재가 가진 특유의 발랄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인물들이 내뱉는 말들이 그들을 닮아 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문장의 분위기가 휙휙 바뀌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 오히려 가끔씩 섬뜩하기도 하다.

   『너를 봤어는 청소년 소설을 주로 쓰던 김려령 작가가 처음으로 쓴 19금 소설이다. 폭력과 성적인 부분 모두 수위가 높아서 자극적이기도 하다. 심지어 살인까지 나온다. 또한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다루고 있다. , 통속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다른 통속적이기만 한 소설과는 다르다.

   앞에서 김려령 작가는 현대인들이 가진 상처에 주목한다고 했다. 어떤 대상이 가진 상처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그 대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너를 봤어의 자극적인 요소들은 인물의 상처를 부각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화제를 만들기 위해 인물들의 상처를 만들어 내거나 자극적인 요소를 집어넣는 것하고는 굉장히 큰 차이다. 인물들과 닮은 문장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작가가 가진 사랑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맨 뒤에는 김려령 작가가 소설을 쓰게 된 동기가 밝혀져 있다. 사람을 죽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죽이고 싶은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의 살인 충동이 아니다. 작가가 실제로 죽이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진 상처와 그 상처로 일어나는 모든 슬픈 일이었을 것이다. 살인과 폭력이 작품 전반에 들어가 있어도 무섭지 않은 이유다.

 

'삼성'의 게임단 지원에 관한 단상.

 

 


  10월 19일. 나는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 있었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에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결승전 개막을 알리는 카운터가 울렸고, 나는 숫자를 세었다. 내 주위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다. 하나의 목소리가 '일'을 외쳤을 때, 전용준 캐스터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전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롤드컵'이 열린 것이다.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부스에 들어가자, 이매진 드래곤즈가 등장했다. 그들은 테마곡인 'warriors'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소리였다.

   'Warriors'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늘 생각했던 거지만, 이 노래 가사는 제법 한국 E스포츠 판과 닮아 있다. 특히 중간의 코러스가 "Here we are, dont turn away now, We are the warriors that built this town. Here we are, dont turn away now, We are the warriors that built this town. From Dust." 라고 웅장하게 부르는 부분이 그러하다. 'Warriors'에서는 '우리'는 '먼지 위', 즉 아무 것도 없는 기반 속에서 도시를 건설한 전사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저 '게임'이었던 것을 '스포츠'로 발전시키고 향유하고 있는 E스포츠 계를 말하는 것 같다.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롤드컵의 테마곡이 이 곡이었던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11월 24일에 데일리 E스포츠에서는 '삼성 게임단의 아쉬운 행보' 라는 타이틀로 기사를 냈다. 삼성 갤럭시 게임단에는 프론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지원이 충분하지 않았으며, 세계 최고의 팀이 공중분해 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첫 문단부터 마지막 문단 까지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먹먹했다. E스포츠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고, 삼성 갤럭시 선수들이 잡음이 많았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만 같았다.

   블루와 화이트를 합쳐서 열 명. 그 열 명 중에 삼성에 남은 선수는 아무도 없다. 아무리 매 시즌 화려하게 리빌딩을 하는 팀이 많다지만, 이 정도로 리빌딩이 된 적은 없었다. 삼성 또한 먼지가 되었고, 그 위에 다시 빌딩을 '쌓아 올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롤드컵에서 형제팀이 나란히 1, 4위를 하던 그 순간도 이제 어제로만 남게 되었다. 선수 한 명도 잡지 못했다는 것은, '삼성'이라는 국내 대기업에서 활동하는 것 보다 다른 쪽의 제안이 '이득'이었다는 소리거나, 삼성에 잔류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정도로 선수 케어가 안 됐다는 소리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에게 시드권을 왜 줬는가, 하는 의문이 제시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곧 있을 롤챔스 스프링 리그에서 선수가 모두 이탈한 삼성과, 가장 최근 성적이 안 좋았던 CJ에게 시드권을 지금한 것은 대기업 스폰의 '안정성' 때문이라고 한다. CJ는 꾸준히 성적을 내 왔고, 선수들 또한 멀쩡하게 소속되어 있다. 그러나 삼성은 성적은 내왔지만 그 성적을 내던 알맹이들이 사라진 상태다. 알맹이 없이 겉 껍질만 있으며, 12월에 열린다는 시범리그에서 '쓸' 선수 또한 '모집중이다'는 말만 하고, 선수 케어가 전혀 안 되고 있는 삼성이 시드권을 받을만 했는지는 의문이다.

   삼성 게임단을 소개하는 삼성 스포츠단 홈페이지 에는 삼성 갤럭시 E스포츠단의 링크가 없다. 삼성전자 칸 홈페이지 또한 먹통이다. 삼성칸 홈페이지는 멀쩡히 존재하던 것을 링크수정과 롤팀 통합의 이유로 내려놓았다곤 하는데, 이런 상황에선 삼성이 언제 손을 때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스타크레프트 2의 삼성 소속 선수인 송병구는 이번 시즌을 선수이자 플레잉코치로 뛴다고 한다. 선수 출신 코치로써 코칭에만 전념하는 것이 아니다. 송병구 선수는 '선수'이자 '플레잉코치'이다, 곧 이러한 감독 부재의 상황에서 '감독'이라는 감투까지 쓰게 될 것이 자명한 일이다. 무리한 인력 감축이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이 과연 옳거나 좋은 일일까?

   이런 면을 볼 때, 삼성이 곧 E스포츠에서 손을 땔 거란 유언비어가 돌아다니는 것도 무리가 아닌 상황이다. 지금의 삼성 갤럭시를 보면 IM을 스폰싱하다가 돌연 스폰싱을 중단한 LG의 사례가 떠오른다. 부디 삼성은 그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시드 선발전이 끝나고, 곧 12월 시범 리그가 출범할 것이다. 삼성은 아직 누구를 뽑았다는 확정적인 사실도 말해주지 않는다. 곧 스타크레프트 프로리그 또한 개막할 것인데, 시청자의 입장에서 불안하기만 하다. 지금 삼성 게임단은 먼지 위에 있다. 그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삼성은 다시 '도시'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삼성 왕조의 끝을 보여줄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다시 한 번 삼성이 롤드컵의 주인이 되려면, 혹은 프로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리려면 프론트가 제 일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 왕조'가 역사 뒤안길로 사라진 망한 왕조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표절과 도작, 상처받는 것은 피해자뿐만이 아니다

 

 

 

소설 커뮤니티 사이트라고 한다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조아라라는 사이트이다. 가장 많은 유저수를 보유하고 있고 하루에도 수백, 수천 건의 다양한 장르의 소설들이 업데이트 되는 곳이다. 이곳은 선호작이라는 것을 도입하고 있는데 이 선호작 수가 많은 사람에 한해, 인기작가 타이틀을 주기도 하고 출판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있다.

 

조아라에서 요즘 가장 핫한 장르는 로맨스로 여기에 판타지가 겹쳐지고 상당한 필력이 갖춰진다면 투데이 베스트라는 상위권 작품으로 등록되기도 한다. 최근에 왕비의 밀실이라는 작품이 이 투데이 베스트에 올랐다. 로맨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고 지나가야 한다는 말이 농담 삼아서 나오기도 했다.

 

이 작품은 헨리 8세와 앤 볼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여자주인공은 앤 볼린의 사촌 여동생으로 가상의 인물이고, 남자 주인공은 스페인 출신의 미남자였었다. 세계사가 전공이라던 작가답게 역사적 고증은 물론 그 시대의 생활상도 생생히 그려내었다. ‘미친 필력이라며 팬 층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70편 가까이 연재가 되었을 때 터졌다.

 

BL이라는 장르를 아는가. BLBoys love의 약자로 남성과 남성을 로맨스로 엮는 소설과 만화 등을 일컫는 말이다. 이 장르도 요즘에는 당당히 한 장르로 인정받고 출판이 되기도 한다. 비주류와 사회적 시선이라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인기가 많은 작품은 일반적 로맨스나 판타지 못지않게 수익을 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는 samk, 쏘니 등의 작가들이 있다. 이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으로 이미 개인출판 또는 e-book 출간을 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작품왕비의 밀실이 표절을 했다.

 

BL이라는 비주류 작품이라지만 개인출판 혹은, 이미 e-book출간이 되어버린 것을 표절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커뮤니티는 당연히 마비가 되었다. 왕비의 밀실작가는 그 작품을 좋아하고 팬을 자처했던 독자를 한 순간에 바보로 만들었다.

 

표절은 남의 저작물의 일부를 몰래 따다 쓰는 것을 말하고, 도작은 남의 저작물 일부 혹은 전부를 따다가 대강 고쳐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왕비의 밀실을 과연 표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왕비의 밀실은 한 작품만 따다가 만든 것이 아니다. 익숙한 말인 표절을 사용하긴 했지만, 작품을 읽다보면 인물과 상황만 조금 바꾸었을 뿐 대화내용은 단어나 조사를 빼고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절과 도작은 경계가 애매하다. 둘 다 남의 저작물을 가지고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표절이라고 하거나, 도작이라고 하거나 그것은 보는 사람 가치관에 따라 정하는 것일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표절이든 도작이든, 그것은 피해자에게 가장 큰 상처다. 본인이 고생해가며 만든 저작물을 한순간에 도둑맞은 것이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 이유로는 극성팬에게 있다. 표절작의 극성팬은 자신의 작가님을 감싸기 위해서 고작 그것가지고 쪼잔하게 군다며 오히려 피해자의 험담을 하기도 한다. 자신의 작품을 도둑맞고 그 이후 욕까지 피해자가 뒤집어쓰는 꼴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 작품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먼저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순수하게 좋아했던 그 작품이 표절작, 혹은 도작이라는 사실은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왕비의 밀실은 명백하게 도작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도작보다는 표절이 익숙한 관계로 표절로 표기하겠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왕비의 밀실작가는, 독자에게 배신감보다 더한 상처를 주었다.

 

표절문제가 불거지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작가는 발뺌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죄해야한다. 그래야 독자들은 배신감을 느낄지언정 배신감 이상의 상처를 받지 않는다. 얼마나 인기를 얻고 싶으면 그랬겠냐며 동정을 하기도 하고 진심으로 사죄하고 새로운 작품으로 돌아올 때, 이번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지켜보겠다며 일종의 응원을 보내기도 한다.

 

표절 문제가 불거지자 왕비의 밀실작가는 연재 중에 보이지 않았던 서브작가를 내세워 자신은 잘못이 없다며 발뺌했다. 70편 가까이 응원을 보내왔던 독자를 배신한 것은 물론, 독자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만들었고 상처를 줬다. 지금까지 작가가 독자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드러난 것이다. 얼마나 쉽게, 그리고 만만하게 보았으면 표절 피해자가 사과를 요구하고 나서야 사죄문이랍시고 서브작가를 내세웠을까. 이미 표절로 인해 배신감을 느낀 독자가 그 서브작가의 실체를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표절 피해자는 작품을 도둑맞은 사람뿐만이 아니다. 그 작품을 좋아해준 사람까지도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의도치 않게 표절을 했다 하더라도 피해자나 독자에게는 상처다. 자신을 믿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런 책임감 없는 짓은 하지 말아야한다. 정말, 아이디어가 겹쳐 의도치 않은 표절이라 하더라도 사과를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야 옳다.

 

아울러, 왕비의 밀실의 작가도 성인다운 책임감을 발휘했으면 좋겠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서브작가의 탓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 작품의 작가로서 책임을 지고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래야 더 이상 표절이 외면하면 넘어가게 되는 그런 무른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아이디어가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시대인 만큼, 표절은 민감한 문제이니 이번 사건을 올바르게 마무리지어 다른 작가들에게도 경각심을 새겨주었으면 한다.

'나를 찾아줘'를 보고

 

 

 

'시나리오의 완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를 찾아줘』를 보고

 

잔잔하면서도 아슬아슬한 - 『비긴 어게인』을 보고

 

 

 

잔잔하면서도 아슬아슬한

- 비긴 어게인을 보고

   

 

   두 사람의 사연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는 노래를 다르게 만들었다. 평범했던 상황이 사실은 처절하고 찌질한 각자의 하루가 교차하고 있는 지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레타는 너무 순진했다. 애인인 데이브와 같이 레코드 회사를 갔을 때 사람들이 보였던 미묘한 반응을 바로 알아차렸어야 했다. 작곡가임에도 불구하고 작업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 커피를 가져다주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녀의 연애가 걱정되었고 불안해보였다. 파트너라는 관계가 한 쪽으로 기울면서 무너졌기 때문에 공존하고 있던 연애 관계도 성립할 수 없을 것이라고 추측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댄의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아내와는 오래도록 별거 중이었으며 따라서 딸과도 소원한 사이였다. 또한 직장에서는 잘렸다. 그것도 딸 앞에서. 사실 그는 잘 나가던 음반 프로듀서였지만 머리나 수염도 덥수룩했고 옷은 후줄근했다. 깔끔하게 각 잡힌 양복을 입은 그의 동업자와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인물들의 상황부터가 아슬아슬한 것이다.

   찌질한 두 남녀는 음악이라는 공통된 매개체를 통해 교감했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교감이 발전해서 생긴 둘의 썸은 언뜻 보일 때마다 아슬아슬했다. 두 사람의 눈이 자주 마주치거나 집안에 그레타의 친구가 있어서 놀라는 모습 또한 썸을 의심하게 했다. 사람에 따라 그 관계가 썸보다는 약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댄이 이어폰 공유기를 그레타와 쓰는 장면을 떠올려본다면, 둘의 사이에 이성(異姓)적인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어폰은 댄이 아내와 결혼 전 공유했던 추억이 담긴 물건이었고, 둘은 그 추억을 재현했기 때문이다.

   그레타는 여러 번 관객의 마음을 졸이게 만든다. 그 중 제일이 다시 연락이 온 데이브와 만나는 것이었다. 앨범이 거의 완성된 후였는데, 서로의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 예전의 파트너 관계를 생각나게 했다. 그것은 데이브도 마찬가지였는지, 계속해서 그레타에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거나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뉘앙스의 말을 한다. 그레타에게 들려주는 곡도 둘이 연인이었던 때 그레타가 지어준 것이다. 가족과 관계가 좋아지고 있는 댄을 본 터라 마침 외로운 그레타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런 아슬아슬한 요소들을 마지막에 전부 안전하게 마무리 짓는다. 댄은 결국 가족에게 돌아가면서 화목한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그레타는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데이브를 마음에서 떠나보낸다. 만든 앨범도 좋은 성과를 거둔다. 자신을 깔보던 레코드 회사 없이 낸 성과라 더욱 의미가 있었다.

   다만 처음부터 끝이 뻔히 보이는 스토리였기에 큰 감동까지 주는 것은 약간 무리가 있었다. 아마 그런 점을 감독도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처절한 시작과 아슬아슬한 중간을 잘 살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잔잔한 분위기를 만들었고, 음악에 관련된 영화답게 장면들을 어우르는 좋은 OST들을 사용했다. 그 덕에 덜 뻔한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유언비어, E스포츠의 그림자


 

 


 

    이틀 전 E스포츠 팀 CJ엔투스에서 세 명의 선수가 팀을 나갔다. 며칠 전에는 나진 E엠파이어 선수들 네 명이 팀을 떠났다. 롤챔스 섬머시즌 우승팀인 KT에로우즈에서도 두 명이 이탈했으며, 롤드컵 우승팀과 4강팀을 보유하고 있는 삼성 갤럭시 또한 팀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선수가 빠져 있다. 안타까운 상황 가운데 우수운 것은, 이 선수들이 팀을 나가기 전에 팀을 나간다는 루머들이 이미 돌았다는 것이다.  '누가 팀을 나간다'는 유언비어는 핼로윈 망령처럼 판을 맴돌고 있다. E스포츠를 좋아하는 팬들은 이 망령에 익숙해져 있다. 언제 현실로 찾아올지 모르기에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하는 것이다. 이 판에서 카더라 통신은 '신빙성 있는 정보'로 취급되고 있다. 


    E스포츠에서 이러한 '카더라 통신'은 용한 점쟁이의 점괘마냥 작용한다. 팀 구단주나 협회같은 위기관리 주체가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팬들은 선수의 게임 아이디에서 기업 명이 떨어진 것을 근거로 선수들의 이적이나 은퇴를 추측한다. 선수들 간의 대화창을 아프리카나 아주부 따위의 방송 매체로 확인하여 카더라에 살을 붙인다. 이런 행위는 이 판에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언비어를 잡으려는 노력과, 정정보도, 후속대처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위기상황에서 유언비어는 자연스럽게 상주한다. 이는 위기관리를 하는 주체가 마땅히 해소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E스포츠 판에서는 그러한 유언비어 정정 과정이나, 정식 입장표명이 매우 미비하게 이뤄진다. KT 롤스터 소속이었던 데스트니 선수나, IM 소속의 스맵 선수가 팀을 나갔다는 말은 팬들이 이미 '추측'한 정보를 출처로 하여 판에 돌았고, 구단은 아주 나중에서야 그 일을 발표했던 것을 기억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유언비어가 제 몸뚱아리를 불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롤챔스 섬머시즌이 끝나고, 1구단 1팀 체제에 대해서 여러 유언비어들이 떠돌았다. 처음 돌았던 루머는 1구단이 1팀을 소유할 수 있으며, 예비선수 두 명을 포함한 일곱 명이 엔트리에 소속된다는 이야기였다. CJ 엔투스의 프로스트-블레이즈, SK T1의 S-K 등, 형제팀 체제가 공고한 한국 롤 판에서 이는 매우 큰 '변화'를 야기시켰다. 이 루머를 양산한 선수가 이미 해외팀에 소속 되어 한국을 떠난 선수라는 점에서 이 유언비어는 '신빙성'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루머를 진화해야 할 협회는 어떠한 제스쳐도 취하지 않았다. 이러한 루머가 팽배 해 있는 상황에서, 여러 선수들이 팀에서 떠났다. 선수가 떠나는 과정 또한, 루머가 돌고 이적 기사가 나는 식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팬들이 지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팬들에게는 자신의 스타가 있다. 자신의 우상이자 응원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팬들은 이런 스타를 보기 위해 시간을 쓰고 돈을 쓴다. 용산으로 몇 시간이 걸려 올라가는 걸 마다하지 않으며, 경기 표를 사고, 시간을 들여 관람한다. 자신의 스타와 응원하는 팀이 판에 남아있기에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팀이 리빌딩이 되고 팀의 '어제'를 아쉬워하며 '내일'을 응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공식입장이 없으니 루머를 믿고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릴 수 밖에 없다.

 

    지지대가 없는 식물은 바람에 쉽게 고꾸라지기 마련이다. 어느 판이든 팬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판'이란 개념부터가 그렇다. 판은 현장이자 자리, 현의의 무대이자 삶이 혼합되어있는 복합적인 공간이다. 판은 강한 현장성을 가지며, 관중이 참여하는 과정에서 '어우름'이라는 대단원으로 나아간다. 팬은 선수들을 지지하며, 선수들의 동기부여에 일조하는 관중이다. 관중이 없는 무대란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개념은 '판'을 무대로 하는 전통유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LOL E스포츠 리그 또한 '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협회와 라이엇은 팬을 전혀 배려하고 있지 않다.

 

   어제 공청회가 열렸다. 공청회란 어떠한 기관이 일정한 사항을 결정함에 있어서 공개적으로 의견을 듣는 형식을 말한다. 그러나 어제 용산에서 열린 리그방식에 대한 공청회는 협회와 라이엇의 '통보'회와 같았다. 의견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팬이나 선수 대표의 의견을 묻는 자리가 아니었다. 요즘 롤 팬들이 가장 관심을 가지는 '10인 로스터'에 대한 입장 표명을 정확히 하는 것도 아니었다. 질문이나 의견에 '고려 해 보겠다'와 '자세히 밝힐 수 없지만'이라고 답변하는 것은 정확한 의사표명이라고 할 수 없다. 유언비어 확산과 팬 이탈을 막기 위한 공청회라고 보기에 어제 행사는 그저 급급한 입장표명과 보여주기식 행사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또 공청회라는 자리에서 '이지훈'선수의 이름을 모르는 모습을 보여주며, CJ형제팀의 두 탑솔러 중 한 사람이 떠나면 되는 게 아니냐는 말을 하는 것은 팬들의 상처를 후벼 파는 행위 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 E스포츠는 열정페이가 가장 만연한 스포츠이다. 게임을 좋아한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모인 선수들을 팬이 지지해주는 방식으로 판이 커왔다. 팬들이 매라를 놓지 못하고 샤이의 향수에 젖는 것. 또한 페이커를 응원하며 폼이 떨어졌다고 하는 SKT T1과 CJ 두 팀을 응원하는 것. IM의 라일락과 진에어의 캡틴 잭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은 그들이 이미 팬들의 마음 속에 들어왔기 때문이고, 팬들이 그들의 열정을 응원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수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만든 제도를 팬들은 기다려왔고, 루머가 판치는 곳에서 마음을 졸여가며 응원해왔다.

 

   루머는 이미 E스포츠의 그림자이다. 정확한 입장표명을 빠르게 해주지 않으며, 선수들이 활동할 수 있는 리그에 대한 소식이나 개편 방안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선 발 뒤꿈치에 진득히 붙어 따라다니는 그림자 만큼이나 루머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협회를 신뢰하며, 케스파를 '개스파'라고 부르지 않겠는가? 답은 이미 자명하다. 판은 관객과 선수들이 만들어 간다. 판이 작아지는 것은 관객의 감소가 불러온다. 이번 롤드컵 결승전에는 E스포츠 역사상 가장 많은 관객이 동원됐다고 한다. 그 '4만명'이 가만히 고여 있다고 해서 안심할 것은 아니다. 그 속이 많은 루머들과 그것을 부채질하는 사람들의 입김 때문에 서서히 썩어가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할 것이다. 판은, 팬과 선수가 있어야 성립되는 자리다.

 

  

 

   

 

  

『다락방』 소개글

 

 

 

다락방소개글

 

 

   팀 블로그 돋움의 목적은 대학생들의 교양을 돋우는 것이다. 그래서 책, 연극 · 뮤지컬 등 교양 전반에 걸친 칼럼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 사람이 하나의 칼럼을 맡아서 일주일에 하나씩 써 올리기로 했다. 그러나 칼럼마다 형식과 색깔, 관통하는 주제를 가지고 있다 보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쓰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칼럼은 큰 틀이나 자기만의 색깔, 주제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갈 길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어떤 글이라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교양이라는 큰 범위 안에 있는 다양한 것들을 칼럼 세 개만으로 뮦어버리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우리들은 쓰고 싶은 것에 대해 쓰지 못하는 것은 굉장히 불행한 일이며 계속 생각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렇기 때문에 팀 블로그 돋움안에서도 많은 것에 구애받지 않고 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다락방이다. 다락방은 보통 우리들만의 자유로운 공간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실제로도 그렇다. 집에 다락방이 있었던 초등학생 때, 친구들과 들어가 놀곤 했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굉장히 좁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만의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엄마 몰래 숨어서 놀기 좋은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락방에 있을 때 밖에서 엄마가 나를 찾으면 다락문을 살짝 열고 얼굴만 내밀어서 대답하기도 했다. 그 때까지 엄마는 내가 다락방에 있었던 것을 잘 모르는 일이 많았다.

   또한 다락방은 방 안에 두기 애매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두는 곳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우리 집 다락은 주로 잘 보지 않는 책들로 채워져 있었고 운동회 때 쓰던 밀짚모자가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 다락방의 이러한 특성들이 우리가 고민하고 있엇던 것들을 해소해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팀 블로그를 집으로, 우리의 칼럼들을 침실이나 거실 등의 집 안 공간으로 생각해 본다면, 칼럼에 미처 담을 수 없었던 것들은 필요하지만 어디 두기는 애매한 물건들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락방은 특정한 형식을 정해놓지 않고 별다른 주제도 정해놓지 않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써야 한다는 기간도 없다. 팀 블로그를 하고 있는 세 명 중 누구라도 쓰고 싶을 때 쓰는 칼럼이 될 것이다. 이것이 다락방의 색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