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흔드는 책을 만난 적이 있는가, ─ 리스본행 야간열차』

 

 

 

세상을 살다가, 다리 위에서 자살하려는 여자를 구해 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또 그 여자가 남기고 간 붉은 코트에서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을 발견할 확률은 어떻게 될까. 또 모든 걸 버리고 그 의 저자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는 이러한 다분히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런 천만분의 일도 될까 말까 한 확률을 가지고서, 저자는 독자의 영혼을 붙들만한 글을 써낸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은 그레고리우스와 아마데우다. 그들은 시공간을 초월해 으로 만난다. 그레고리우스는 언어학자이자 사랑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다. 만성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는 다소 딱딱하고 틀에 박힌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소울메이트아마데우. 그는 천재였고, 어른이자 어린아이였다. 아마데우의 글을 번역하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을 비춰본다. 책을 통해 접한 아마데우의 일생은 그레고리우스에게는 작은 혁명이었다. 변화의 시작인 것이다. 

이 책에서는 언어가 주는 힘과 책으로 남은 텍스트의 마력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다른 언어로 쓰인 책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언어를 배우고, 탐방한다. 낯선 언어들은 처음에는 장벽이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기초적인 틀이다. 알 수 없는 언어로 남겨진 책을 읽는다는 것은, 미지의 틀처럼 그레고리우스가 차마 모르던 자신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도 파악하지 못한 잃어버린 나를 다른 언어로 쓰인 인생을 마주한다. 매력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마치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체험이다.

세상을 살아갈 때 자신의 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범람하는 정보들, 기사, 컨텐츠들은 독자에게 생각을 강요한다. 사상과 정보가 홍수처럼 넘치면서 우리는 우리를 땅에 디디게 하는 그림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독자 자신의 생각과 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회에서 휩쓸리지않게 만든다. 이 때 우리는 이러한 축을 어떻게 생성하느냐에 대해 생각 해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처럼 말하며 앵무새처럼 살아가지 않고, 진정한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자신의 그림자가 진정 나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파악해야만 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딱딱한 남자였다. 그는 언제나 규칙적인 사람이었다. ‘일탈을 경험한 적도 없고, 한 적도 없다. 칸트처럼 정확하게 시간을 배분해서 살아가는 남자이기도 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식을 어린아이들에게 전달하는 것만이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그레고리우스를 땅에 묶어놓는 그림자는 의무감이었다. 그런 그를 변화시킨 건 아마데우가 쓴 한 권의 책이었다. 그의 발자취를 충동적으로 따라가면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이 잃어버렸던 자신의 편린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가 새 안경을 사서 쓰는 장면이 있다. 두껍고 낡은 안경에서, 세련된 디자인의 가벼운 안경으로. 안경은 눈이 나쁜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보는 창이다. 그가 안경을 바꿔 끼는 장면은 그가 리스본에 도착해서 딱딱했던 과거의 모습을 벗어버릴 것이라는 암시와, 한 권의 책으로 변화할 인생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코를 짓눌렀던 무게를 사라지게 한 것은 책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해자를 책을 매개로 하여 만나게 된다.

자기개발서나, 진정한 자신을 찾아내라를 주제로 하는 강연은 주로 리더가 될 것을 요청한다. 책을 통해서 자신을 이해하라는 것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매우 장황한 문체와 수사, 언어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와 혁명시기의 암울함과 로맨스가 매우 복잡하게 들어 있는 책이다. 그러나 그 구조를 간단하게 도식화하자면 한 남자가, 책 속의 생각을 받아들이면서 저자의 발자취를 찾아가고, 결국엔 자신을 파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와 책, 독자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그러나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그레고리우스는 강산이 두어 번 변할 동안 자신의 일상을 고수해 온 남자다. 이런 남자가 자신의 모든 걸 던져버리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타게 한 ’. 그런 책을 만나야 하는 것은 인생을 살아갈 때 있어서 의무와 같은 일이 아닐까. 물론 그런 책을 만나기는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이 인생의 숙제를 마치기 위해서는 독서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책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이런 그 또한 인생을 바꿀 책을 찾는 데 평생을 바쳤는데, 책 한 번 잡지 않고서 인생을 바꿀 책을 찾는 건 어렵다는 말은 어리광에 가깝다. 일단 읽어야 한다.

이 책을 읽은 지는 좀 되었다. 그렇지만 이 책을 종강 즈음에 소개하는 이유는 독서에 대해 강조하기에 이만한 책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비장의 카드가 나중에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이야기들을 소개하면서 교양을 돋우려고 했던 내 칼럼 파트에 가장 마침표로 어울리는 책일 것이다. 카네이션 혁명기를 살았던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 그 남자가 생각하고 사유하던 것을 인식하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던 그레고리우스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매우 황홀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연처럼 가벼이 다가오는 책들과, ‘추천이나 과제의 이름을 달고 무겁게 찾아오는 인연들 까지 읽고 먹어치워야 하는 것이다.

이제 곧 종강이고, 앞으로 기나 긴 방학이 찾아 올 것이다. 넘쳐흐르는 시간에 가끔씩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현실감각을 되잡고, 뭔가를 꼭 하고 싶은 기분이 들면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는 것이 어떨까. 어쩌면 이르게 당신의 인생을 뒤흔들 책을 만날 수도 있고, 이 급박하게 흘러가는 세계에서 당신을 지탱해 줄 그림자를 만날 수도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그레고리우스가 우연이 겹친 필연을 타고 자신을 이해하게 된 것처럼 이 칼럼의 독자 또한 그러한 경험을 하길 바란다. 읽고 사유하고 읽는 것은 자신을 만나기 위한 첫 걸음이다.

물론 책을 읽는 과정은 인내와의 싸움이다. 철학적인 문장에 좌절 할 수도 있고, 작가의 사유에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물에 도저히 이입을 하지 못하거나, 그가 말하는 말들이 당신의 기준에서는 치명적인 오류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실패한 인연에 연연해하지 말아야 한다. 독자가 싫다고 생각할지라도 그러한 인연들은 언젠가 당신의 그림자가 되어 당신을 지지할 것이고, 그 다양한 독서 경험이 쌓이다가 어느 순간 운명이라고 밖에 칭할 수 없는 책을 만날 것이다. 두근거리지 않는가, 떨리는 가슴을 안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올라탔던 그레고리우스와 비슷한 경험을 할 그 날이. 잃어버린 내 영혼의 조각을 찾아 비로소 가 되는 그 감각이. 그 감각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

 

'나무'를 심는 토양을 비옥하게, ─ 『미학 에세이』

 

 

   구성주의 교육이론의 이론적인 가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며 나름대로 구성하는 존재라는 것. 둘째, 인간의 활동이나 행동은 사회와 문화적 맥락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고, 그 영향으로 얻은 '지식'을 몸에 축적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학습이란 자신의 세상에 대한 지식을 재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해서 '세계관'을 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나름대로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의 세계관을 쌓아 올리는 존재이다. 이는 예술에 탐닉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예술은 작가라는 한 인간이 '세계를 이해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사회적인 사건이나, 마음을 울릴만한 자연 경관을 보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글, 그림, 영화와 같은 '형태'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한 작품은 그 작가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간혹 '순수'라는 말을 달고 나오는 예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 순수한 감정상태, 자연경관 등을 '그렇게 본' 작가의 생각이 있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작가의 우주, 즉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은 그것을 보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느낌만으로는 작품을 정확하게 이해 할 수 없다. 그들이 작품을 창작할 때 기반이 되었던 토양을 조금이나마 알아야지 그 '느낌'이 왜 그랬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영화 『판의 미로』의 괴물이 스페인의 화가인 고야의 '아들을 먹는 사투르노'에서 따왔다는 것을 알면, 그 괴물에게서 느껴지던 '불쾌함'과 '무서움'의 실체를 어느정도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이해'를 위해서는 정확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 그림을 볼 때 마다 그 그림에 무슨 '이론'과 '사상'이 적용됐는지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림이나 예술을 보기 전에 미리 맥락을 짚는 일은 가능하다. 바로 '독서'를 통해서다.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에는 예술과, 거기에 영향을 준 이론들이 정리되어 있다. 한 분야에 국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 비극, 죽음, 분변증, 성과 육체의 예술 등, 여러 항목에 대해 총체적으로 정리한 에세이집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에세이 라는 말이 불어에서는 동시에 '시도'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본격적으로 미학적 사유를 특정한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전에 먼저 가벼운 글로 앞길을 타진해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말한다. '미학적인 사유'의 전 단계인 '느낌'에서, 그 느낌에 기초가 되는 이론을 묶어 냈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미학 에세이』란 책은 읽기 편한 문장으로, 이론들을 우리의 세상에 기초해서 설명한다. 읽기 편한 글로 되어 있고 자칫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주제 또한 가볍게 읽힌다.

   구성주의 교육이론에서는 실제적 맥락이 강조된다. 지식이 실제로 사용되는 분야에서 유리되어 학습된다면, 지식은 비활성적인 지식으로 바뀌며, '학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미학 에세이』는 잘 쓰여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을 소개하고, 그 이론에 대한 저자의 견해와, 실제적인 경험, 사회적인 현상 등을 소개하고 결론을 내리는 구성이며, 이 구성과 저자의 결론이 명쾌하기 때문이다.

    예술을 이해하는 것은 나무를 기르는 것과 같다. 토양은 사전 지식과 이론적 교양이다. 토양이 좋지 못하면 나무가 잘 자라지 않듯, 기본적인 교양과 사전적 이해가 없다면 예술에 대한 이해 또한 '작은 나무'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작가와 나란히 서서, 그 사람이 경험했던 '우주'를 자신의 눈으로 보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가. 작가의 우주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스펙터클'한 경험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훌륭한 거름이다.

욕망이라는 가면은 진실을 헤집고. ─ 테네시 윌리엄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처음 접한 것은 일본 작가인 온다 리쿠의 소설 초콜릿 코스모스에서였다. 여주인공 두 명이 오디션을 보는 장면이었는데, 9장을 블랑쉬의 1인극으로 개작하여 한 명이 연기하고, 다른 한 명은 블랑쉬의 그림자를 연기하는 장면이었다. 그 소설을 읽은 지 한참이 지났어도, 여주인공 교코가 불 켜지 말아요!’ 라고 외치던 장면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소설 자체의 상황이 급박했었던 것도 있지만, 여전히 그 대사가 생경하게 다가오는 것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대사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불 켜지 말아요는 블랑쉬가 미치나 스탠리에게 보여주었던 허울을 완벽하게 벗겨내는 대사이다. 폭로의 끝이며 그 때까지 쌓아왔던 블랑쉬라는 여자의 자존심마저 무너트리고 파멸하게 만드는 대사이기도 하다.

 

 

블랑쉬 :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거죠?

미치 : 당신 얼굴을 확실하게 보려는 거요!

블랑쉬 : 물론 나를 모욕하려는 뜻은 아니겠죠?

미치 : 아니요, 그냥 사실 그대로를 보자는 거죠.

블랑시 : 사실주의는 싫어요, 나는 마법을 원해요! 그래요, 그래, 마법이요! 난 사람들에게 그걸 전해주려고 했어요, 나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아요.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실이여야만 하는 것을 말해요, 그런데 그게 죄라면 달게 벌을 받겠어요! 불 켜지 말아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1장으로 이루어진 희곡이다. 그러나 이 희곡의 백미는 위 대사가 나오는 9장이라고 할 수 있다. 9장을 분기점으로 하여 블랑쉬는 급격하게 몰락해간다. 어둠 아래에서 가려왔던 진실을 들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 켜지 말아요!’라는 대사는 직접적인 대사가 아니라 간접적인 대사이다. 은 그녀가 그동안 블랑쉬로써 존재하기 위해 지켜왔던 모든 것들을 파괴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진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희곡이기 때문에, 좋은 점을 말하려면 끝도 없지만 이 희곡은 가장 대사의 힘이 강한 희곡이 아닐까 싶다. 대사는 상징을 동반하고, 돌아가는 상황을 임팩트 있게 전개한다. 그러나 이는 직접적으로 대변되는 것이 아니다. 전등갓을 가리는 암시에서부터 시작되어 극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폭발시킨 것이다. 대사 하나로 도화선을 만드는 능력에 감탄할 정도다.

 

아마 온다 리쿠가 초콜릿 코스모스에서 여주인공 두 명이 격돌하는 장면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9장으로 그려낸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진실을 밝혀내려는 미치와 거짓의 베일을 둘러 자신을 보호하려는 블랑쉬의 대립이 첨예하게 말로 드러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소설 내에서 1인극으로 개작해서, 여주인공이 블랑쉬의 대사만 반복해도 무게감을 가지는 이유는, 대사 하나하나에서 불을 켜지 말라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불안감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이란 것은 참 신기하다. 말의 표면으로 좋다는말을 하면서도 상황에 따라서는 싫다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비꼴 수도 있고, 전혀 아닌데 그런 척 말을 내뱉을 수도 있다. 불안감을 감추는 블랑쉬가 미치에게 침묵으로 일관한 것이 아니라 말을 계속 내뱉던 것도 이러한 말의 속성 때문이 아닐까. 말과 말 사이에서 느껴지는 심리적인 거리감도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블랑쉬는 과거 안에 사는 여자다. 그녀는 자신이 예전에 소유하고 있던 농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 결과 공작새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꾸미고 거짓으로 단장하는 일을 서슴치 않아 한다. 그녀의 모든 삶은 허언으로 쌓여 온 결과이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격동하는 산업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된 인물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블랑쉬가 의미하는 것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녀가 가진 개인적인 상처를 가리고, 남 앞에서 '잘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명작' 반열에 든 작품 속 인물은 어느 시대에 가져다 놔도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다. 블랑쉬 또한 마찬가지다. SNS나 인터넷 상에서 자신의 허물을 가리고, 잘난 점만 과시하면서 생활하는 인물이 현대의 블랑쉬가 아닐까 싶다. 자신의 페르소나와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진실 없는 '가면'은 언젠가 깨어지기 마련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쉬가 결국 그러했듯. 그녀가 꺼놓고 다니던 침실의 불은 '켜지기 위해' 존재했다. 어두운 곳에서만 만나던 연인은 밝은 곳에서 그녀를 보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극 초반 블랑쉬의 여정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극락이라는 곳에서 내리라고 하더군요". 이 말처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결국 '묘지'라는 이름의 전차로 갈아탈 수 있다.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극락'에서 내리는 것은 결국 그 사람 혼자만의 '극락'에 당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진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현대의 '블랑쉬'들은 알고 있을까.

 

같은 차를 타더라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도시민들을 위한 ─ 장진 '택시 드리벌'

 

 


    택시를 타고 멀리 나갈 일이 있으면, 장진의 '택시 드리벌'이라는 희곡이 떠오르곤 한다. '택시'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또 택시를 탈 때마다 같은 기사님을 만나지 못해서 일지도 모른다. 택시는 언제나 '첫만남'을 강제한다. 언제나 같은 콜을 부른다 해도 같은 기사님이 오는 것은 드문 일이며, 항상 비슷한 요일과 시간에 택시를 잡는다고 해도 같은 사람의 택시를 타는 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같은 택시를 탄다고 해도 그걸 알아차리는 일은 드물다. 그것은 기사와 손님이 완벽한 타인이기 때문이며, 거리에 수많은 택시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장진의 '택시 드리벌'에 나오는 손님들도 완벽한 타인이다. 그들은 택시 기사가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과거가 어떤지에 대해서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목적지만을 생각하고, 자신의 목적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어깨들은 겁먹을 승객이나 기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공항을 가자는 손님들도 택시기사에게는 관심이 없다. 택시의 운전석과 나머지 좌석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막이 존재한다. 그곳에서 '소외'된 개인이 나타나며, 원자화되고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장진의 '택시 드리벌'을 읽으면서 장소에 대한 생각을 했다. 희곡에서 '장소'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꼭 그 장소에서 일어나야 하는 일인 것이다. 이 희곡에서의 '택시'라는 공간도 그러하다. 앞에서 말한 것 처럼 감정적이고 개인적인 교류가 일어나지 않는다. 택시 기사와 승객 사이는 '남남'이다. 감정이나 소통할 수 없는 공간이 '택시'이다. 그렇기 때문에 택시기사의 자아는 불안정 하다. '나'라고 상정하는 존재가 셋이나 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있다.

   개인 택시라는 공간 속에서 도시는 그가 떠나온 고향과 대비된다. 자신의 애를 밴 여자가 존재하며 자신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고향은 도시보다 인간적이고 따스하다. 이 극에서 택시 기사에게 의미가 있는 여자는 크게 두 사람이다. 핸드백을 잃어버린 여자와 놓고 온 여자이다. '사랑'을 한다는 점에서 겹쳐질만 한데, 도시의 여자는 환상 속 그녀보다 녹록치 않다. 도시에서의 사랑고백은 '성희롱'이라는 단어가 된다. 고민할 것도 없이 감정의 교류가 절단된 것이다.

   장진은 '택시 드리벌'의 공간을 통해 소시민의 일상과 다양한 인간군상을 나타내고 있다. 다양한 인간이 등장하는데도 독자의 시선이 '택시 기사'에 몰리는 것은, 모든 에피소드들이 다 주인공의 성격이나 과거에 대한 생각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승객이 끊임없이 타고 내리는 택시 속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은 주인공인 택시 기사다.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킬 수 밖에 없는 테크닉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다양한 사람들이 타고 내리면서 활발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은 '택시'라는 공간을 소외된 공간으로 표현하고 이끌어가는 내용이 대단하다. 소재에 대한 고민을 했다는 게 보인다. 이러한 고민이 소재를 다루고 주제를 형상화하는데 있어서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희곡의 주 무대(장소)에 대한 고민도 극작가가 되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생각 해야할 부분인 것 같다.

    또 다양한 사람이 등장하는데도 극적 긴장감이 해소되지 않는 부분은 '가방'이라는 소재 때문이다. 도시에서 만난 여자와의 매개물인 가방은 극 초반부터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으로 등장하며 독자(혹은 관객)의 뇌리에 각인된다. 관객은 그것이 어떻게 극에 작용할 것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며 고민하게 된다. 가방이 등장하는 부분이 클라이맥스와 가깝고, 결국 가방이 주제와도 연관되면서 극적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언젠가 택시를 타고 멀리 나갈 일이 있다면, 그리고 그 짧은 드라이브에 감상적이 되는 순간이 온다면 장진의 '택시 드리벌'을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한 마디 걸어주지 않는 기사님, 혹은 기사님이 말을 걸었을 때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이 희곡이 당신에게 한 걸음 쯤, 가깝게 다가 올 것이다. 원자화 된 개인들로 구성된 하나의 집합이, 잠시나마 택시라는 공간 속에서 교집합이 되었다가 다시 흩어지는, 이 도시의 '기본 요소'를 발견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당신은, 도시와 택시가 일맥상통하다는 것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눈은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린다. <<백석 평전>>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을 하고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기리에 살자



  왜 눈이 내리는 지 아는가, 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 할 것인가. 대부분의 사람은 '눈'의 이유를 구름 속에 있는 수중기의 탓으로 돌릴 것이다. 구름 안 수중기는 기온이 낮아졌을 때 얼음 결정을 생성하고, 그 결정 안에 수증기가 달라붙어서 눈이 만들어진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석은 눈이 나리는 까닭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라고.

   이를 '수능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시에서 으레 사용되는 '낯설게 하기' 기법과 관련이 있다고 분석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시행은 그렇게 해석하기에는 너무나도 로맨틱하다. 푹푹 나리는 눈발을 보며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하기 때문에, 라고 말하는 백석은 실제로도 로맨틱한 모-던보이였다. 그러나 당신은 한국의 모던 보이의 '나타샤'가 누군지 알고 있는가? 그가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고향의 풍경을 알고 있는가? 그의 작품들이 어떤 배경에서 어떤 모습으로 창작되었는지 알고 있는가, 백석의 시집 <사슴>과, 그가 편집한 잡지들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그의 '시'의 깊이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가?

    1988년도 해금조치로 인해, 대한민국에서도 백석의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백석의 <여승>이나 <정주성>은 수능 특강 문제집에도 쉽게 인용되는 작품이다. 이 작품들의 시대적 배경은 문제집에서도 다뤄지지만, 그가 이 작품을 '어떤 배경'에서 창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묘사하는 통영과 관련된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여인'의 모습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작가와 작품 사이의 연결고리보다 시를 분석하는 데에 힘을 쓰기 때문이다.

   작품을 작가와는 별개로 봐야 한다는 시각도 있지만, 대부분의 작품에는 작가의 흔적이 묻기 마련이다. 작가가 창조하는 인물이나 시상은 그가 겪은 경험과, 그가 창작할 당시의 배경에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다. 그의 나타샤와 그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작품을 읽는다면 시의 맛을 배로 느낄 수 있다. 그의 족적을 따라 가는 과정 속에서 독자는 시인을 이해할 수 있고, 그의 시어들의 참맛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떠들어 대는 정보는 시대별로 정리가 되어있지도 않으며, 일부분만 나와있는 경우가 많다. 이 때 도움이 되는 책이 안도현 시인의 <<백석 평전>>이다.

   안도현 시인은 자신의 시집 제목을 '간절하게 참 철없이' 라고 지을 정도로 백석에 게 푹 빠져있는 분이다. 그는 백석에 대해 남아있는 자료와 일대기에 자신의 시각과 해석을 더해 <<백석 평전>>을 만들었다. 자신의 영혼까지 진동시킨 모던보이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안도현 시인은, 백석의 일대기와 그림자를 밟아가며 그에 대한 연구를 했다. 백석의 <선우사>마냥 정갈한 문체로 쓰인 담담한 글을 읽다보면, '백석'이라는 시인에 대한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그의 인생을 저당잡은 '박경련'이라는 여자와 '자야'라는 여자나 그를 둘러싼 교우관계나 시대상황을 읽다 보면, 그의 시를 좀 더 깊게 이해 할 수 있다. <<백석 평전>>은 백석의 그림자를 밟아갈 수 있게 돕는다. 백석의 시에 대해 오해할 수 있는 부분 또한 정정하여 바로잡아 놓았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백석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물론 시는 마음으로 읽는 것이며, 작품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는 의견 또한 존재한다. 그렇지만 일제강점을 살아가던 모더니스트이자 로맨티스트의 일대기를 아는 것은, 그의 시어들에 의미를 더하며 이해를 돕는 것이다. 그의 일생을 안다는 것은 커피에 디저트를 곁들이는 것과 같다. 디저트가 커피의 맛을 더욱 풍부하게 해주는 것과 같은 역할을 <<백석 평전>>이 하고 있는 것이다. 바야흐로 가을이다. 시 읽기 좋은 계절임과 동시에 눈 오는 겨울을 목전에 둔 계절인 것이다. 눈이 왜 내리는지 알기 좋은 계절이다. 눈이 사랑하기 때문에 온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로맨틱함에 대해서 탐구하기 좋은 날이기도 하다. 이틀 내 오던 비가 그치고 높은 하늘이 보이는이 좋은 날에, 백석 시집과 평전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자신한다.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에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그의 『춤』은 느린 왈츠다.




   도시에는 동전마냥 앞면이 존재한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앞'과, 그림자에 가려진 '뒤'다. 재벌이 나오는 일일드라마가 도시의 '앞'을 보여준다면, 『춤』은 그림자에 눈길을 준다.  박형준의『춤』을 읽다 보면 나는 포대기에 싸인 아이가 된다. 포대기를 칭칭 감고 엄마 등의 따뜻함을 온 몸으로 느끼는 것 같다. 박형준의 시는 그만큼 타인에 대한 시선이 매우 따스하다. 시에서 나타나는 목소리들이 꼭 우리내 엄마 같다. 엄마 등에 업힌 채로 시인이 속삭이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도시의 그림자 속에도 빛이 든다. 특히, 「꽃이 필 시간」을 읽을 때 그런 기분이 들었다.



꽃이 필 시간


공중에서 

어디론가 하염없이 떠밀리는

쓸쓸한 듯

꿈꾸는 듯

하나 둘 켜지는 불빛들


위로 위로 솟구치는

산동네의 불빛들

거대한 새의 날개에

점점히 박혀 있는 산과

산맥들


쫙 펴진 날개 속을

부지런히 오르고 있는 사람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에서 하염없이 

떨구어지는 비늘들



  「꽃이 필 시간」에서 중요한 건 제목과 시를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멀리서 달동네의 불빛이 켜지는 것을 보고, 거대한 새를 연상했다. 그 연상한 새에게서 산맥과 산을 보고, 그것을 오르고 있는 한 사람에 주목한다. 시의 어디에도 꽃이 필 시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만 원경에서 근경으로 움직이면서 주목된 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이 시에서 이야기 한 꽃이 민들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점점히 박힌 불빛처럼 산동네에 퍼지는 민들레 씨앗 같다. 그 주목된 한 사람도 도시의 아스팔트에서 억세게 자라는 민들레가 아니었을까 싶다. 

   좀 더 감성적으로 들어가자면, 박형준의 「꽃이 필 시간」을 읽고 있자면, 엄마 등의 포근함이 느껴진다. 엄마가 자식에게 이야기 하는 것처럼, 이미지를 세세하게 표현해주기 때문이다. 또 동시에 세피아색으로 빛바랜 옛날 사진을 회상하는 것 같은 이미지를 준다. 그 옛날 사진을 엄마가 보고, 엄마의 추억이나 지금의 현실을 엄마 무릎에 앉아 있는 나에게 들려주는 것 같다. 어린 아이의 입장에서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이, 시적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따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산동네를 올라가는 한 사람을 말해줌으로서 어린아이에게 에둘러 산동네란 게 있다고 설명해주는 것만 같다. 어쩔 수 없는 포근함이 느껴진다. 「꽃이 필 시간」에서 ‘쫙 펴진 날개 속을 / 부지런히 날고 있는 사람’은 시적 화자에게 있어서 부정적인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연민의 대상이다. 그의 어조에서는‘엄마 친구 누구가 참 안 됐어.’ 라고 연민을 담아 씁쓸하게 말하는 우리 엄마가 생각난다. 

   우리 엄마의 목소리마냥 『춤』에서 박형준의 시는 매우 포근하다. 나는 『춤』에 등장한 모든 시에 이 포근함이 스며 있다고 생각한다. 이 포근함은 나직하며, 세상에 대한 연민을 품고 있다.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남에 대해서 나쁜 생각을 잘 못하는, 그리고 사람을 보면 도와주고 싶어 하는 우리 엄마 같은 시들이 가득 담겨있다. 박형준의 시에서 느리게 표현되는 모든 것들은 포대기에 감싸져 ‘엄마’등에 업혀있다. 그만큼 시인은 따스한 시를 쓰고 있다. 「황새」에서도 마찬가지다.



황새


눈보라 치는 밤이었다


보퉁이를 손에 꼭 그러쥐고

서울역 광장 역처마에 서서

노인 하나가 정신없이 길 건너 빌딩의 유리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차를 기다리는 것일까

자신의 침과 먼지로 번들번들 빛났을 누더기

오리발 갈퀴처럼 땅바닥을 비비며,

눈보라 속에서 그 하얀 깃이 끌리는 것이

멸족한 새의 환영 같았다


눈보라에 앞으로 흔들리는 모습이

제 부리를 길 건너 빌딩의 유리창에 콕콕 가져다대는 시늉처럼 보였다


이런 밤에 고향을 그리다가

불빛 속에 집을 지으려 길 건너 쪽으로 날아갔던 것일까

보퉁이를 손에 꼭 그러쥔 노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다가,

다시 눈보라 속에 지워진다

포도에 흩날리는 눈발이

새가 수면에 남긴 발자국처럼 바람에 사라진다

유리창에 가라앉은 수면에 끊임없이

끼룩대는 불빛들,


겨울밤이 매섭다



    「황새」에서 등장한 시적인물인 ‘노인’또한 박형준은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시적 화자는 매서운 겨울밤에 보퉁이를 쥐고 건물을 바라보는 노인을 바라보고 있다. 박형준은 그 모습을 느릿하니 멈추어서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엄마가 시장 통에서 나물 파는 노인네들을 보면 발걸음이 느려지는 것 마냥, 그렇게 그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도 그는 노인을 연민한다. 도시의 그림자에 시선을 둔다. 그림자 안에 빛을 덧칠하려는 시인의 시선이 아름답다.

   또한 박형준은 「어스름 새벽」이나, 「멍」에서 나이 먹은 사람들의 생의 일면을 느리게 묘사한다. 도시의 가장 낮은 부분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산수유 꽃」과 「당신의 눈에 지구가 반짝일 때」에서는 당신에게 사랑을 느린 곡조로 노래하면서 이미지를 표현한다. 도시와는 다른 느린 곡조임에 분명하다. 

   그의 『춤』은 ‘셔플댄스’나 ‘클럽댄스’마냥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 항상 ‘빨리빨리’를 요구하는 세상에서, 엄마의 무릎 마냥 정체해 있을 수 있는 공간이다. 빠른 박자의 음악이 귓가에서 폭주하듯 울리는 모습이 아니라, 엄마의 무릎에서 엄마가 귀를 파주며 갉작거리는 그 느린 리듬을 닮았다. 포대기에 싸여 들었던 그 느린 노래가 생각난다. 박형준은 빠르지 않고 사람을 안정시키는 그 풍경을 만들어 낸다. 타인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들고, 돌아보게 만든다. 빠른 곡조의 일상을 풀어 느리게 만든다. 느린 풍경은 어머니의 품마냥 따스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어찌 빠를 수만 있을까. 현대 사회에서 ‘빠름’은 거의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빠름, 빠름 빠름, LTE 워프’를 원하는 시대다. 그 시대에서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을 상처줄 수 밖에 없다. 인스턴트라는 말이 맞는 시대다. 그 시대에서 박형준은 연민과 느림을 실천한다. 평소와는 다른 리듬으로 걷게 만드는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박형준은 이 빠른 시대에서 음악의 속도를 늦추며 묻고있다. 빠른 춤보다는 느린 춤이 좋지 않느냐고. 도시의 양면은 결국 한 동전이며, 그 왈츠같은 리듬으로 뒷면을 바라보고 사랑하자고. 



『초콜릿 코스모스』 ─ 당신의 영혼을 흔들만한 '꿈'



『초콜릿 코스모스』 

─ 당신의 영혼을 흔들만한 '꿈'에 대하여─


   《유리가면》이라는 만화를 본 적이 있다. 우리 엄마 세대에 연제되던 만화인데, 두 주인공이 연극의 궁극의 경지인 ‘홍천녀’라는 배역을 따내기 위해 노력하는 내용이다. 내가 이 만화를 처음 접한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그림체는 ‘구시대’적이었지만 한 번 책을 잡으니 놓을 수가 없었다. 여러 연극 이야기들이 재미있기도 했었지만, 마야와 아유미라는 두 주인공이 ‘홍천녀’라는 공통적인 꿈을 위해 나아가는 과정과 성장하는 모습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의 목표를 위해 ‘자기 자신’까지 내던질 수 있는 열정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떨린다.

   온다 리쿠의 『초콜릿 코스모스』는 여러모로 《유리가면》을 생각나게 하는 이야기다. 두 명의 여자 주인공이 등장하며, 한 사람은 마야처럼 ‘천재’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아유미처럼 ‘노력형’ 인간이다. 또한 여러 연극이 등장하며, 경합의 형태로 배역 오디션을 본다는 점 또한 유사하다. 작가인 온다 리쿠가 묘사하는 주인공들의 분위기 또한 만화 주인공들과 궤도를 같이 한다.

   앞서 말했듯 만화 《유리가면》은 두 소녀가 꿈에 정면으로 마주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는 온다 리쿠의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같다. 소설가는 두 소녀가 ‘연극’이라는 장르를 통해 꿈을 찾고, 그것을 정면으로 독대하며, 이를 이루기 위해 성장하는 모습을 씀으로써, 이를 읽는 독자에게 꿈이란 무엇인가, 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가 말하는 ‘꿈’은 장래희망조사서에 채워 넣는 용도의 것이 아니다. 인생을 갈아 엎고, 영혼을 뒤흔들만한 그런 비전으로써의 꿈이다.

    요즘 최종 목표인 '비전'과 단기 목표인 '장래희망'을 구분하지 못하는 청춘이 많다. 그만큼 그들이 단기 목표를 두고 치열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며, 비전을 추구하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대한민국의 입시구조는 너무나도 대학 위주,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는 것을 목표로 짜여 있어서, 그 코스를 그대로 밞아오면서 꿈을 잃어버리는 청춘이 많다. 인터넷 신조어로 '대2병'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2병'은 우물 안 개구리 처럼 고등학교에 갇혀, 대학이라는 '꿈'을 위해 성적에 맞춰 진학한 친구들이 주로 겪는 병이다. 더 이상 추구할 것이 없으니 허무하고, '대학'을 위해 취미생활을 희생하며 걸어왔기 때문에 할 게 없어서 상실감을 겪는 것이다.

   『초콜릿 코스모스』에서는 두 여자주인공이 나온다. 어렸을 때 부터 연극을 했으며 부던히 노력했지만, 배우로서의 꿈이 결국 부모님이 깔아준 레드카펫 위에만 있었던 '아즈마 쿄코'와, 어렸을 때 부터 카라데를 하다가 연극에 처음 도전하는 천재 '사사키 아스카'라는 인물이다. 전설적인 프로듀서 세리자와 다이지로의 신작 연극을 통해 두 사람은 자신들의 목표에 대해 진지하게 인식하게 된다. 먼저 아즈마는 자신이 부모님이 주신 길을 안전하게 걸었다는 것을 깨닫고, 좀 더 높은 곳에 닿고 싶다고 생각한다. 연극에서 진정한 배우가 되는 '선'을 넘길 주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스카 또한 그녀의 인생에서 주를 차지하고 있던 '허무함'을 지울 수 있는 것이 연극이라는 걸 깨닫는다. 두 사람은 같은 무대에서 영혼이 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자신 까지 잊어버릴 수 있는 꿈을 무대 위에서 찾는 것이다.

   작품에선 '데이지 꽃'에 대한 묘사가 있다. 이 '데이지 꽃'은 작품 안에서 보는 오디션 대상작품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여주인공 블랑쉬가 거의 실성해서 내뱉는 대사에서 나오는 꽃이다. 그러나 이 꽃은 아스카와 쿄코가 꿈에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실제로 닿았던 '꿈'의 공간을 대변하고 있다. 단순한 소품이 아닌 배우로서의 열망을 상징하는 소재다. 작가는 이 두 인물이 '데이지 꽃'에 닿는 모습을 그리면서 이렇게 묻고 있다. 아스카와 쿄코의 영혼을 흔들만한 꿈은 연극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영혼은 어디에 흔들리고 있습니까, 하고. 이 『초콜릿 코스모스』를 소개하는 나 또한 묻고 싶다. 청춘의 꿈은 어디에서 피어 있느냐고.

   우리들은 코스모스다. 별 볼일 없이 길가에 피어있는, 우주의 이름을 한 꽃이다. 우리는 가능성이며 곧 우주인 것이다. 가을이 되면 꽃이 피어나는 건 당연한 것 같지만, 사실은 꽃을 피우겠다는 꽃의 의지가 있어야만 이뤄지는 과정이다. 우리 또한 어떻게 피어나겠다, 하는 비전이 있어야한다. 우리는 일 년 살이 꽃이 아니지 않는가. 천천히 피었다가 다시 봉오리를 만들고, 또 다시 꽃을 피우는 여러해살이 '사람'으로써 꿈을 독대해야 하는 게 아닐까. 꽃대가 없으면 꽃은 허리를 들고 하늘을 볼 수 없다. 우리에게 있어서 장기적인 '비전'은 곧 꽃의 허리와 같다. 

   '대2병'을 겪으며 방황하는 것은 나쁜 게 아니다. 꿈을 찾기 위한 여정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허리가 없어 꺾이는 자신의 상태를 무시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목표를 찾지 않는 것이다. 물론 안정적인 삶을 버리란 소리는 아니다. 지금 『초콜릿 코스모스』는 안정적인 삶을 거친 이후에도 추구할만한, 그런 영혼을 흔들만한 상대를 찾으라는 것이다. 그 흔들림 속에서 열정이 피어나는 것이다. 코스모스는 작지만 '우주'의 이름을 하고 있다. 청춘 또한 우주이며 코스모스다. 그러나 그런 가능성도 의지가 없으면 필 수 없다. 나는 다시 한 번 묻고자 한다. 코스모스여, 당신은 지금 무슨 색의 우주로 피려 하는가. 

 

정의선의 천일야화 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남은 인생을 전부 다 쏟아도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읽기에는 가지고 있는 밤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당신에게 맞는 이야기도, 혹은 맞지 않는 이야기도 있을 것이고, 재미있는 이야기와 재미없는 이야기 또한 공존할 것입니다. 도움이 되는 이야기나, 쓸모 없는 이야기들도 있겠지요. 그렇지만 안타까운 것은 세상에 가득 찬 이야기들 속에서 꼭 필요한 것만 걸러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아라비안 나이트'를 아십니까. 천일야화(千一夜話)라고 불리는 이 설화집은 동침한 처녀를 매일 죽이는 왕과, 그러한 살육을 막기 위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세헤라자데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한 여인의 지혜에서 비롯된, 천일 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저는 세헤라자데가 죽지 않은 이유가, '이야기를 선별'해서 들려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의 이야기들은 하룻밤의 짧은 정을 통하고 아내를 죽이는 그 냉혈한같은 마음에 약을 발라주거나 상처를 내었을 것입니다. 쓰린 마음을 치유하며, 자신의 악행을 돌아보게 하는 역을 했던 게지요.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의미가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입니다. 왕을 위한 거름망이 되었던 거지요. 천일 간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세헤라자데가, 왕과 행복한 결말을 맞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앞에서 한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세상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모를, 그런 많은 이야기들이요. 자신에게 맞는 이야기를 찾는 것 또한 어려울 것입니다. 책의 제목만 봐도 머리가 어질어질 할지도 모릅니다. 여러 매체들은 청춘에게 책을 읽으라 말하나, 그 '책'을 아는 것 조차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이 '천일야화' 코너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첫 걸음을 도울 것입니다.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며, 그 안에서 짚을 수 있는 쟁점이나 생각을 소개할 것입니다.


    <<돋움>>은 대학생들의 교양을 한 걸음 '더' 돋우기 위해 만들어진 팀블로그 입니다. 책은 교양을 쌓는데 있어 가장 간편한 수단일 것입니다. <천일야화>는 간단한 책 리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미리 읽고 이야기 해준다는 것 만으로도 책을 읽는 것에 대한 부담이 덜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읽어 볼 만한 책들을 소개함으로써 지식이나 교양의 정수를 뽑을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앞으로 <천일야화>는 세헤라자데같이 거름망 같은 칼럼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기대 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