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흔드는 책을 만난 적이 있는가, ─ 리스본행 야간열차』

 

 

 

세상을 살다가, 다리 위에서 자살하려는 여자를 구해 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또 그 여자가 남기고 간 붉은 코트에서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을 발견할 확률은 어떻게 될까. 또 모든 걸 버리고 그 의 저자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는 이러한 다분히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런 천만분의 일도 될까 말까 한 확률을 가지고서, 저자는 독자의 영혼을 붙들만한 글을 써낸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은 그레고리우스와 아마데우다. 그들은 시공간을 초월해 으로 만난다. 그레고리우스는 언어학자이자 사랑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다. 만성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는 다소 딱딱하고 틀에 박힌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소울메이트아마데우. 그는 천재였고, 어른이자 어린아이였다. 아마데우의 글을 번역하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을 비춰본다. 책을 통해 접한 아마데우의 일생은 그레고리우스에게는 작은 혁명이었다. 변화의 시작인 것이다. 

이 책에서는 언어가 주는 힘과 책으로 남은 텍스트의 마력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다른 언어로 쓰인 책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언어를 배우고, 탐방한다. 낯선 언어들은 처음에는 장벽이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기초적인 틀이다. 알 수 없는 언어로 남겨진 책을 읽는다는 것은, 미지의 틀처럼 그레고리우스가 차마 모르던 자신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도 파악하지 못한 잃어버린 나를 다른 언어로 쓰인 인생을 마주한다. 매력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마치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체험이다.

세상을 살아갈 때 자신의 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범람하는 정보들, 기사, 컨텐츠들은 독자에게 생각을 강요한다. 사상과 정보가 홍수처럼 넘치면서 우리는 우리를 땅에 디디게 하는 그림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독자 자신의 생각과 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회에서 휩쓸리지않게 만든다. 이 때 우리는 이러한 축을 어떻게 생성하느냐에 대해 생각 해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처럼 말하며 앵무새처럼 살아가지 않고, 진정한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자신의 그림자가 진정 나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파악해야만 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딱딱한 남자였다. 그는 언제나 규칙적인 사람이었다. ‘일탈을 경험한 적도 없고, 한 적도 없다. 칸트처럼 정확하게 시간을 배분해서 살아가는 남자이기도 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식을 어린아이들에게 전달하는 것만이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그레고리우스를 땅에 묶어놓는 그림자는 의무감이었다. 그런 그를 변화시킨 건 아마데우가 쓴 한 권의 책이었다. 그의 발자취를 충동적으로 따라가면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이 잃어버렸던 자신의 편린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가 새 안경을 사서 쓰는 장면이 있다. 두껍고 낡은 안경에서, 세련된 디자인의 가벼운 안경으로. 안경은 눈이 나쁜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보는 창이다. 그가 안경을 바꿔 끼는 장면은 그가 리스본에 도착해서 딱딱했던 과거의 모습을 벗어버릴 것이라는 암시와, 한 권의 책으로 변화할 인생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코를 짓눌렀던 무게를 사라지게 한 것은 책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해자를 책을 매개로 하여 만나게 된다.

자기개발서나, 진정한 자신을 찾아내라를 주제로 하는 강연은 주로 리더가 될 것을 요청한다. 책을 통해서 자신을 이해하라는 것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매우 장황한 문체와 수사, 언어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와 혁명시기의 암울함과 로맨스가 매우 복잡하게 들어 있는 책이다. 그러나 그 구조를 간단하게 도식화하자면 한 남자가, 책 속의 생각을 받아들이면서 저자의 발자취를 찾아가고, 결국엔 자신을 파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와 책, 독자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그러나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그레고리우스는 강산이 두어 번 변할 동안 자신의 일상을 고수해 온 남자다. 이런 남자가 자신의 모든 걸 던져버리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타게 한 ’. 그런 책을 만나야 하는 것은 인생을 살아갈 때 있어서 의무와 같은 일이 아닐까. 물론 그런 책을 만나기는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이 인생의 숙제를 마치기 위해서는 독서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책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이런 그 또한 인생을 바꿀 책을 찾는 데 평생을 바쳤는데, 책 한 번 잡지 않고서 인생을 바꿀 책을 찾는 건 어렵다는 말은 어리광에 가깝다. 일단 읽어야 한다.

이 책을 읽은 지는 좀 되었다. 그렇지만 이 책을 종강 즈음에 소개하는 이유는 독서에 대해 강조하기에 이만한 책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비장의 카드가 나중에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이야기들을 소개하면서 교양을 돋우려고 했던 내 칼럼 파트에 가장 마침표로 어울리는 책일 것이다. 카네이션 혁명기를 살았던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 그 남자가 생각하고 사유하던 것을 인식하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던 그레고리우스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매우 황홀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연처럼 가벼이 다가오는 책들과, ‘추천이나 과제의 이름을 달고 무겁게 찾아오는 인연들 까지 읽고 먹어치워야 하는 것이다.

이제 곧 종강이고, 앞으로 기나 긴 방학이 찾아 올 것이다. 넘쳐흐르는 시간에 가끔씩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현실감각을 되잡고, 뭔가를 꼭 하고 싶은 기분이 들면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는 것이 어떨까. 어쩌면 이르게 당신의 인생을 뒤흔들 책을 만날 수도 있고, 이 급박하게 흘러가는 세계에서 당신을 지탱해 줄 그림자를 만날 수도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그레고리우스가 우연이 겹친 필연을 타고 자신을 이해하게 된 것처럼 이 칼럼의 독자 또한 그러한 경험을 하길 바란다. 읽고 사유하고 읽는 것은 자신을 만나기 위한 첫 걸음이다.

물론 책을 읽는 과정은 인내와의 싸움이다. 철학적인 문장에 좌절 할 수도 있고, 작가의 사유에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물에 도저히 이입을 하지 못하거나, 그가 말하는 말들이 당신의 기준에서는 치명적인 오류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실패한 인연에 연연해하지 말아야 한다. 독자가 싫다고 생각할지라도 그러한 인연들은 언젠가 당신의 그림자가 되어 당신을 지지할 것이고, 그 다양한 독서 경험이 쌓이다가 어느 순간 운명이라고 밖에 칭할 수 없는 책을 만날 것이다. 두근거리지 않는가, 떨리는 가슴을 안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올라탔던 그레고리우스와 비슷한 경험을 할 그 날이. 잃어버린 내 영혼의 조각을 찾아 비로소 가 되는 그 감각이. 그 감각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

 

소외받은 사람들의 로맨스 ─『아멜리에』

 

 

안도현 시인의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세상에게 이기지 못하고 / 너는 섬으로 가고 싶겠지 / 한 며칠, 하면서 / 짐을 꾸려 떠나고 싶겠지 / 혼자서 훌쩍, 하면서라는 구절이다. 이 시의 화자처럼 나도 떠나고 싶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별거 아닌 일들이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엔 일들이 파도처럼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조차 고통이었다. 흐름에 깎이는 백사장처럼, 휩쓸리며 사라져 버리고 싶기도 했다.

 

내가 아멜리에를 접한 건 고등학교 3학년 제2외국어 시간에서였다. 선생님이 힘드실 때 마다 보곤 하는 영화라고 말씀 하시면서 틀어주셨던 영화는 잔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백사장을 간질이곤 하는 맑은 날의 파도 같았다. 영화의 주인공은 보잘 것 없으며’, ‘정상에서 빗겨난사람들이다. 아멜리의 아버지는 부인을 잃고 폐쇄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 영향으로 아멜리 또한 공상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서 발을 디디지 못하고 갈등한다.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 또한 현실 부적응자에 가깝다. 즉석 증명 사진기에서 잘못 나와 찢어 버린 사진들을 스크랩하는 게 취미인 니노는 어렸을 적 집단 따돌림을 당한 경험이 있다. 아멜리에와 니노는 찢긴 사진 같은 사람들이다. 어딘가 결함이 있고, 그 결함 때문에 타인에게 쉽게 다가가기 어려워, 자신의 취미나 공상으로 도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아멜리에라는 영화는 소외받은 주인공들의 로맨스를 통해 잔잔함에 대한 미학과 사랑에 대한 의미를 전달한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은 파도처럼 거세게 밀려오는 힘든 일들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차분하다. 아무리 창 밖에서 비바람이 세게 분다고 해도,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쉬이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영화는 파리의 풍경을 담으며 잔잔하게 진행된다. 시간을 들여 파리의 풍경을 묘사하고, 사람들을 묘사한다. 아멜리의 출생부터, 그녀의 가족들과 좁은 인간관계를 해설자의 입으로 천천히 말해준다. 러닝타임의 삼분의 일을 아멜리의 인생에 할애하면서, 관객이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물들어가게 한다. 남자 주인공과 처음 마주치고 나서도 그녀의 인생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격류가 치는 것은, 오히려 그가 소중한 물건을 떨어트리고 나서 부터다.

영화는 그녀를 마치 깊은 곳에 고이는 물과 같이 묘사한다. 파리 속에서 살아가는 그녀는 나름대로의 기준과 줏대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는다. 자신이 반한남자주인공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한다. 급하기만 한 현대 사회에서 그녀가 살아가는 모든 움직임들은 파리라는 도시를 낭만적으로 만듦과 동시에, 관객에게 여유를 선사한다.

처음 아멜리에를 봤을 때 가장 감동했던 점은, 극의 템포가 느리다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은 모든 부분에서 여유가 부족한 시간이다. 책을 읽을 시간도 부족했고, 스트레스를 풀 시간도 부족했다. 당시 내 소원은 누군가가 날 납치해서 일주일 만 도서관에 감금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입시라는 건 거대한 폭포와도 같아서, 잘못 하면 급류를 타고 낭떠러지로 떨어져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았다.

그 때 접한 아멜리에는 나에게 느려도 괜찮아.’ 라고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설레임에 가득 차 빠르게 진행 될 것 같은 연애조차도 숨바꼭질을 해 가며 만남을 지연하는 그 느린 템포가, 스토리를 진행하는 것 보다 아멜리가 살아가는 파리의 정경을 보여주는 카메라 워크가 위안으로 찾아왔다. 그 때 처음, 느려도 괜찮다는 걸 알았다. 한낱 로맨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느림을 새삼스럽게 재인식 했던 것이다.

또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조곤조곤하게 이야기해주는 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작가 지망생으로서 앞으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고민할 때 길을 알려줬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림을 다시 안 것처럼, 나는 내가 쓰게 될 글이 느린 방향으로 다가가도 괜찮을 거란 걸 알게 되었다. 빠르게 달려가며 스스로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에게 내 글이 천천히 스며들듯, 마치 아멜리에처럼 다가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들은 여러 가지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 시험지 위의 다섯 개 보기 중 하나를 고르는 방식은 아니다. 왜냐하면 시험지와는 달리 선택지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연한 걸 놓치고 있을 때가 많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혹은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등의 책이 유행하는 것은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답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멜리에는 로맨스 가득한 스토리를 통해서 느릴 수도 있다는 선택지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가끔씩 남들에게 떠밀려 거세게 흔들릴 때 이 영화를 보면 마음이 진정되면서 내 을 찾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찬 파도에 밀려온 모래더미에 가려진 여유로움이라는 선택지를 다시 찾아주곤 한다. 안도현 시인의 에서 나오는 것처럼 세상에 이기지 못하고 떠나고 싶을 때, 섬이 되어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겨울이다. 길에는 눈이 얼어 있고, 하늘은 당장이라도 울 것 처럼 어둡다. 마음에 여유가 없기 쉬운 계절이다. 얼어붙은 볼처럼 마음에도 살얼음이 끼고, 그것이 올 겨울동안 절대로 녹지 않을 것 같은 아스팔트 위의 만년설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몰린 느낌이 든다면, 그렇다면, 단 두 시간 정도를 투자해서 아멜리에를 보는 건 어떨까. 소외받은 사람들의 느긋한 로맨스가 어쩌면 잃어버린 여유느림이라는 선택지를 찾아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혼자서 훌쩍, 하고 떠나고 싶은 날 옆에 가만히 다가오는 섬이 될 것이며, 당신 마음의 '봄'이 될 것이다.

 

소중한 시간을 만든 컴퓨터 프로그램 지식채널e -「엘리자」를 보고


 

소중한 시간을 만든 컴퓨터 프로그램 

지식채널e -엘리자를 보고

 

   사람들은 저마다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하나쯤은 있다. 물론 아직까지 그러한 사람을 찾지 못한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살아가면서 생기는 가족, 연애 등과 관련된 문제들이 생겼을 때 해결책을 찾거나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에 믿을만한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여기, 그런 역할을 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다. '엘리자'. 엘리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굉장하다.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엘리자와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있다.

   엘리자는 사람들이 말하면 '맞장구쳐주기''끊임없이 질문해주기'라는 두 가지 스킬을 쓴다. 예를 들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했을 때, 엘리자는 '그 사람에 대해서 더 말해 줄래요?'라는 식으로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화가 난 사람에게는 동의를 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엘리자가 자신을 이해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고 사람들은 엘리자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사람들 사이에 대화와 소통이 줄어들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심화되는 것이 기본적으로 깔려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현상이 단순히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해버리면 곤란하다. 주변에 상담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자와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일단, 특정 주제에 관해서는 상담자와의 견해 차이가 있어서 대화가 통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이해를 바랄 수 없게 된다. 나와 비슷한 사람은 있지만 완전히 같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 엘리자는 고민이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언제나 듣기 좋거나 원하는 이야기만 해줄 수 없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입장이나 생각을 이해는 하지만, 그 사람을 위해 듣기 싫은 말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리고 상담자 본인의 입장 때문에 싫은 소리를 해야 할 때가 생기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서 듣고 싶은 대답을 정해놓고 질문을 한다는 의미의 답정너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사람은 사실 사소한 것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약간의 차이들이 있을 뿐이지 누구나 기대심리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지만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속이 시원해질 것 같다는 이중적인 마음이 작용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비밀이나 고민 등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속에 있는 무거운 짐을 잠시 덜어내는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 프로그램과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정화시키는 방법이 좋지 못하다고 단정지어서 말하기는 어렵다.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서는 많은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이미지로 떠올려보면 씁쓸하다. 개인 간의 소통이나 교감이 안 되는 상황은 사회의 소통과 교감이 막히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엘리자가 만들어진 것은 1966년이다.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도 엘리자와 비슷한 프로그램이 있다. , 스마트폰 시대에 맞춰서 어플로 만들어져 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고 소통하는 면에서 점점 퇴보해가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혜민 스님은 내 이야기를 따뜻하게 잘 들어주는 사람과의 만남은 보약 한 첩을 먹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하셨다. 추위가 계속 되는 요즘, 우리도 주변 사람들에게 보약이 되어보는 것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