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흔드는 책을 만난 적이 있는가, ─ 리스본행 야간열차』

 

 

 

세상을 살다가, 다리 위에서 자살하려는 여자를 구해 줄 확률은 얼마나 될까. 또 그 여자가 남기고 간 붉은 코트에서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을 발견할 확률은 어떻게 될까. 또 모든 걸 버리고 그 의 저자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는 이러한 다분히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런 천만분의 일도 될까 말까 한 확률을 가지고서, 저자는 독자의 영혼을 붙들만한 글을 써낸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은 그레고리우스와 아마데우다. 그들은 시공간을 초월해 으로 만난다. 그레고리우스는 언어학자이자 사랑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다. 만성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는 다소 딱딱하고 틀에 박힌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소울메이트아마데우. 그는 천재였고, 어른이자 어린아이였다. 아마데우의 글을 번역하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을 비춰본다. 책을 통해 접한 아마데우의 일생은 그레고리우스에게는 작은 혁명이었다. 변화의 시작인 것이다. 

이 책에서는 언어가 주는 힘과 책으로 남은 텍스트의 마력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다른 언어로 쓰인 책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하여 언어를 배우고, 탐방한다. 낯선 언어들은 처음에는 장벽이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기초적인 틀이다. 알 수 없는 언어로 남겨진 책을 읽는다는 것은, 미지의 틀처럼 그레고리우스가 차마 모르던 자신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도 파악하지 못한 잃어버린 나를 다른 언어로 쓰인 인생을 마주한다. 매력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마치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체험이다.

세상을 살아갈 때 자신의 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범람하는 정보들, 기사, 컨텐츠들은 독자에게 생각을 강요한다. 사상과 정보가 홍수처럼 넘치면서 우리는 우리를 땅에 디디게 하는 그림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독자 자신의 생각과 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회에서 휩쓸리지않게 만든다. 이 때 우리는 이러한 축을 어떻게 생성하느냐에 대해 생각 해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처럼 말하며 앵무새처럼 살아가지 않고, 진정한 자신을 발견해야 한다. 자신의 그림자가 진정 나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파악해야만 한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딱딱한 남자였다. 그는 언제나 규칙적인 사람이었다. ‘일탈을 경험한 적도 없고, 한 적도 없다. 칸트처럼 정확하게 시간을 배분해서 살아가는 남자이기도 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지식을 어린아이들에게 전달하는 것만이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그레고리우스를 땅에 묶어놓는 그림자는 의무감이었다. 그런 그를 변화시킨 건 아마데우가 쓴 한 권의 책이었다. 그의 발자취를 충동적으로 따라가면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이 잃어버렸던 자신의 편린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가 새 안경을 사서 쓰는 장면이 있다. 두껍고 낡은 안경에서, 세련된 디자인의 가벼운 안경으로. 안경은 눈이 나쁜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보는 창이다. 그가 안경을 바꿔 끼는 장면은 그가 리스본에 도착해서 딱딱했던 과거의 모습을 벗어버릴 것이라는 암시와, 한 권의 책으로 변화할 인생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코를 짓눌렀던 무게를 사라지게 한 것은 책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해자를 책을 매개로 하여 만나게 된다.

자기개발서나, 진정한 자신을 찾아내라를 주제로 하는 강연은 주로 리더가 될 것을 요청한다. 책을 통해서 자신을 이해하라는 것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매우 장황한 문체와 수사, 언어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와 혁명시기의 암울함과 로맨스가 매우 복잡하게 들어 있는 책이다. 그러나 그 구조를 간단하게 도식화하자면 한 남자가, 책 속의 생각을 받아들이면서 저자의 발자취를 찾아가고, 결국엔 자신을 파악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와 책, 독자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인연이라고 할 수 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그러나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그레고리우스는 강산이 두어 번 변할 동안 자신의 일상을 고수해 온 남자다. 이런 남자가 자신의 모든 걸 던져버리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타게 한 ’. 그런 책을 만나야 하는 것은 인생을 살아갈 때 있어서 의무와 같은 일이 아닐까. 물론 그런 책을 만나기는 매우 어렵다. 그렇지만 이 인생의 숙제를 마치기 위해서는 독서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책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다. 이런 그 또한 인생을 바꿀 책을 찾는 데 평생을 바쳤는데, 책 한 번 잡지 않고서 인생을 바꿀 책을 찾는 건 어렵다는 말은 어리광에 가깝다. 일단 읽어야 한다.

이 책을 읽은 지는 좀 되었다. 그렇지만 이 책을 종강 즈음에 소개하는 이유는 독서에 대해 강조하기에 이만한 책이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비장의 카드가 나중에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이야기들을 소개하면서 교양을 돋우려고 했던 내 칼럼 파트에 가장 마침표로 어울리는 책일 것이다. 카네이션 혁명기를 살았던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 그 남자가 생각하고 사유하던 것을 인식하고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던 그레고리우스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매우 황홀할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연처럼 가벼이 다가오는 책들과, ‘추천이나 과제의 이름을 달고 무겁게 찾아오는 인연들 까지 읽고 먹어치워야 하는 것이다.

이제 곧 종강이고, 앞으로 기나 긴 방학이 찾아 올 것이다. 넘쳐흐르는 시간에 가끔씩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현실감각을 되잡고, 뭔가를 꼭 하고 싶은 기분이 들면 도서관에서 독서를 하는 것이 어떨까. 어쩌면 이르게 당신의 인생을 뒤흔들 책을 만날 수도 있고, 이 급박하게 흘러가는 세계에서 당신을 지탱해 줄 그림자를 만날 수도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그레고리우스가 우연이 겹친 필연을 타고 자신을 이해하게 된 것처럼 이 칼럼의 독자 또한 그러한 경험을 하길 바란다. 읽고 사유하고 읽는 것은 자신을 만나기 위한 첫 걸음이다.

물론 책을 읽는 과정은 인내와의 싸움이다. 철학적인 문장에 좌절 할 수도 있고, 작가의 사유에 공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물에 도저히 이입을 하지 못하거나, 그가 말하는 말들이 당신의 기준에서는 치명적인 오류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실패한 인연에 연연해하지 말아야 한다. 독자가 싫다고 생각할지라도 그러한 인연들은 언젠가 당신의 그림자가 되어 당신을 지지할 것이고, 그 다양한 독서 경험이 쌓이다가 어느 순간 운명이라고 밖에 칭할 수 없는 책을 만날 것이다. 두근거리지 않는가, 떨리는 가슴을 안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올라탔던 그레고리우스와 비슷한 경험을 할 그 날이. 잃어버린 내 영혼의 조각을 찾아 비로소 가 되는 그 감각이. 그 감각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

 

소외받은 사람들의 로맨스 ─『아멜리에』

 

 

안도현 시인의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세상에게 이기지 못하고 / 너는 섬으로 가고 싶겠지 / 한 며칠, 하면서 / 짐을 꾸려 떠나고 싶겠지 / 혼자서 훌쩍, 하면서라는 구절이다. 이 시의 화자처럼 나도 떠나고 싶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별거 아닌 일들이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엔 일들이 파도처럼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조차 고통이었다. 흐름에 깎이는 백사장처럼, 휩쓸리며 사라져 버리고 싶기도 했다.

 

내가 아멜리에를 접한 건 고등학교 3학년 제2외국어 시간에서였다. 선생님이 힘드실 때 마다 보곤 하는 영화라고 말씀 하시면서 틀어주셨던 영화는 잔잔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백사장을 간질이곤 하는 맑은 날의 파도 같았다. 영화의 주인공은 보잘 것 없으며’, ‘정상에서 빗겨난사람들이다. 아멜리의 아버지는 부인을 잃고 폐쇄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 영향으로 아멜리 또한 공상의 세계와 현실 사이에서 발을 디디지 못하고 갈등한다.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 또한 현실 부적응자에 가깝다. 즉석 증명 사진기에서 잘못 나와 찢어 버린 사진들을 스크랩하는 게 취미인 니노는 어렸을 적 집단 따돌림을 당한 경험이 있다. 아멜리에와 니노는 찢긴 사진 같은 사람들이다. 어딘가 결함이 있고, 그 결함 때문에 타인에게 쉽게 다가가기 어려워, 자신의 취미나 공상으로 도피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아멜리에라는 영화는 소외받은 주인공들의 로맨스를 통해 잔잔함에 대한 미학과 사랑에 대한 의미를 전달한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과정은 파도처럼 거세게 밀려오는 힘든 일들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차분하다. 아무리 창 밖에서 비바람이 세게 분다고 해도,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쉬이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영화는 파리의 풍경을 담으며 잔잔하게 진행된다. 시간을 들여 파리의 풍경을 묘사하고, 사람들을 묘사한다. 아멜리의 출생부터, 그녀의 가족들과 좁은 인간관계를 해설자의 입으로 천천히 말해준다. 러닝타임의 삼분의 일을 아멜리의 인생에 할애하면서, 관객이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물들어가게 한다. 남자 주인공과 처음 마주치고 나서도 그녀의 인생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격류가 치는 것은, 오히려 그가 소중한 물건을 떨어트리고 나서 부터다.

영화는 그녀를 마치 깊은 곳에 고이는 물과 같이 묘사한다. 파리 속에서 살아가는 그녀는 나름대로의 기준과 줏대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서두르지 않는다. 자신이 반한남자주인공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한다. 급하기만 한 현대 사회에서 그녀가 살아가는 모든 움직임들은 파리라는 도시를 낭만적으로 만듦과 동시에, 관객에게 여유를 선사한다.

처음 아멜리에를 봤을 때 가장 감동했던 점은, 극의 템포가 느리다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은 모든 부분에서 여유가 부족한 시간이다. 책을 읽을 시간도 부족했고, 스트레스를 풀 시간도 부족했다. 당시 내 소원은 누군가가 날 납치해서 일주일 만 도서관에 감금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입시라는 건 거대한 폭포와도 같아서, 잘못 하면 급류를 타고 낭떠러지로 떨어져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았다.

그 때 접한 아멜리에는 나에게 느려도 괜찮아.’ 라고 말해 주는 것만 같았다. 설레임에 가득 차 빠르게 진행 될 것 같은 연애조차도 숨바꼭질을 해 가며 만남을 지연하는 그 느린 템포가, 스토리를 진행하는 것 보다 아멜리가 살아가는 파리의 정경을 보여주는 카메라 워크가 위안으로 찾아왔다. 그 때 처음, 느려도 괜찮다는 걸 알았다. 한낱 로맨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느림을 새삼스럽게 재인식 했던 것이다.

또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조곤조곤하게 이야기해주는 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작가 지망생으로서 앞으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고민할 때 길을 알려줬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느림을 다시 안 것처럼, 나는 내가 쓰게 될 글이 느린 방향으로 다가가도 괜찮을 거란 걸 알게 되었다. 빠르게 달려가며 스스로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에게 내 글이 천천히 스며들듯, 마치 아멜리에처럼 다가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들은 여러 가지 선택지를 가지고 있다. 시험지 위의 다섯 개 보기 중 하나를 고르는 방식은 아니다. 왜냐하면 시험지와는 달리 선택지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당연한 걸 놓치고 있을 때가 많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혹은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등의 책이 유행하는 것은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답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멜리에는 로맨스 가득한 스토리를 통해서 느릴 수도 있다는 선택지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가끔씩 남들에게 떠밀려 거세게 흔들릴 때 이 영화를 보면 마음이 진정되면서 내 을 찾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찬 파도에 밀려온 모래더미에 가려진 여유로움이라는 선택지를 다시 찾아주곤 한다. 안도현 시인의 에서 나오는 것처럼 세상에 이기지 못하고 떠나고 싶을 때, 섬이 되어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겨울이다. 길에는 눈이 얼어 있고, 하늘은 당장이라도 울 것 처럼 어둡다. 마음에 여유가 없기 쉬운 계절이다. 얼어붙은 볼처럼 마음에도 살얼음이 끼고, 그것이 올 겨울동안 절대로 녹지 않을 것 같은 아스팔트 위의 만년설이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내몰린 느낌이 든다면, 그렇다면, 단 두 시간 정도를 투자해서 아멜리에를 보는 건 어떨까. 소외받은 사람들의 느긋한 로맨스가 어쩌면 잃어버린 여유느림이라는 선택지를 찾아줄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혼자서 훌쩍, 하고 떠나고 싶은 날 옆에 가만히 다가오는 섬이 될 것이며, 당신 마음의 '봄'이 될 것이다.

 

소중한 시간을 만든 컴퓨터 프로그램 지식채널e -「엘리자」를 보고


 

소중한 시간을 만든 컴퓨터 프로그램 

지식채널e -엘리자를 보고

 

   사람들은 저마다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하나쯤은 있다. 물론 아직까지 그러한 사람을 찾지 못한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살아가면서 생기는 가족, 연애 등과 관련된 문제들이 생겼을 때 해결책을 찾거나 위로를 받고 싶은 마음에 믿을만한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놓는다.

   여기, 그런 역할을 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다. '엘리자'. 엘리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굉장하다.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엘리자와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있다.

   엘리자는 사람들이 말하면 '맞장구쳐주기''끊임없이 질문해주기'라는 두 가지 스킬을 쓴다. 예를 들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했을 때, 엘리자는 '그 사람에 대해서 더 말해 줄래요?'라는 식으로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화가 난 사람에게는 동의를 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엘리자가 자신을 이해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고 사람들은 엘리자를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사람들 사이에 대화와 소통이 줄어들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심화되는 것이 기본적으로 깔려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현상이 단순히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고 생각해버리면 곤란하다. 주변에 상담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자와 대화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일단, 특정 주제에 관해서는 상담자와의 견해 차이가 있어서 대화가 통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이해를 바랄 수 없게 된다. 나와 비슷한 사람은 있지만 완전히 같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럴 때 엘리자는 고민이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언제나 듣기 좋거나 원하는 이야기만 해줄 수 없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입장이나 생각을 이해는 하지만, 그 사람을 위해 듣기 싫은 말을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리고 상담자 본인의 입장 때문에 싫은 소리를 해야 할 때가 생기기도 한다. 이와 관련해서 듣고 싶은 대답을 정해놓고 질문을 한다는 의미의 답정너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두고 사람은 사실 사소한 것이라도 자신이 원하는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고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약간의 차이들이 있을 뿐이지 누구나 기대심리는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지만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속이 시원해질 것 같다는 이중적인 마음이 작용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비밀이나 고민 등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는 것은 자신의 속에 있는 무거운 짐을 잠시 덜어내는 효과적인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 프로그램과 대화를 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정화시키는 방법이 좋지 못하다고 단정지어서 말하기는 어렵다.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서는 많은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이미지로 떠올려보면 씁쓸하다. 개인 간의 소통이나 교감이 안 되는 상황은 사회의 소통과 교감이 막히는 상황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엘리자가 만들어진 것은 1966년이다. 거의 50년이 지난 지금도 엘리자와 비슷한 프로그램이 있다. , 스마트폰 시대에 맞춰서 어플로 만들어져 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고 소통하는 면에서 점점 퇴보해가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혜민 스님은 내 이야기를 따뜻하게 잘 들어주는 사람과의 만남은 보약 한 첩을 먹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고 하셨다. 추위가 계속 되는 요즘, 우리도 주변 사람들에게 보약이 되어보는 것이 어떨까.

하진 『전쟁쓰레기』 서평

 

 

19506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크게 번져 다른 여러 나라들까지도 참전하게 만들었고, 그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은 북한과 소련을 도와 중국군을 보냈다. 전쟁쓰레기의 주인공 유안은 황푸군관학교의 학생 군으로 편성되었다.

유안은 중국인으로서 유별난 점은 없다. 당에 집착한다거나, 큰 임무를 맡아 인정받기보단 고향으로 돌아가 약혼녀와 결혼을 하고 홀어머니를 모시며 지내는 것이 그의 꿈이다. 하지만 그가 포로로 잡히면서 그의 꿈은 멀어지게 된다.

전쟁 초반, 중국군들은 모두 자신들이 승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당의 간부들은 그것을 오히려 부추겼다. 그리고 뒤로는 포로들을 학대했다. 포로는 죄인이다. 그들은 모든 군인들에게 포로가 될 바엔 자살을 하라고 부추겼다. 그리고 그들이 포로로 돌아오면 심문을 했다. 군인이 아닌 사람들은 당이 이렇게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것은 당의 간부들도 마찬가지였다. 유안과 함께 포로로 잡힌 페이 인민위원이라는 사람도 심문을 피할 순 없었다. 당을 믿으며 포로수용소에서 살기위한 반항을 했던 이들은 모두 포로라는 이유로 배신을 당했다.

전쟁이 미군과 남한의 승리로 기울자 사람들은 점점 위기감을 느꼈다. 당에 대한 의심은 아니었지만 포로가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포로수용소에서 특히 더 두드러졌다.

나는 운이 좋았다. 나는 당원이 아니었고, 약속을 위반하지도 않았으며, 황푸군관학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국민당 애호자들을 따라 타이완에 가지도 않았다

유안은 포로수용소에서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많은 유혹을 받았다. 타이완에서 일거리를 주선해주겠다, 혹은 자신의 딸과 만나게 해주겠다. 황푸군관학교는 지금 사립 유명 대학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식인을 자처하는 황푸군관학교 출신 포로들은 대부분이 이 유혹에 넘어갔고 곧 타이완으로 넘어갔다.

FUCK USA. 유안의 몸에는 문신이 박혀있다. 처음엔 USA가 아니라 중국을 뜻하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유안이 누군가에 맞고 쓰러진 사이에 해놓은 일이었다. 유안은 이를 지우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지워지지 않고 중국을 뜻하는 글자만, 미국으로 바뀌었다.

유안은 한국전쟁포로로서 상당히 만은 변화를 겪었다. 중국군으로서 당에 봉사도 했고 국민당 애호가들과 함께 지내기도 했으며 타이완으로 넘어갈 수 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전쟁 후반, 돌아온 포로들은 모두 침울해져 있고 패전 소식에 많은 이들이 심문이라는 이름하에 죽어갔다. 하지만 포로들의 처분에 관해서는 전부 묻혔다 할 만큼 중국은 반응이 없었다. 이렇다 할 문제도 없이, 전쟁은 수습되어갔다.

대부분의 전쟁소설은 한 명의 영웅이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풀어간다. 하지만 전쟁쓰레기는 그렇지 않다. 평범하게 자라온 사람 하나가 군인이 되어 전쟁을 겪는 이야기는 흔한 것이 아니다 또 한국 전쟁을 한국 군인이 아닌 다른 나라의 군인이 주인공이란 점도 다르다.

전쟁은 피해자를 만든다. 가해자도 결국 피해자가 되어버리는 일이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에 사람을 죽이고 전쟁이 끝나면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것은 가해자인 국가도, 피해자인 국가도 다르지 않다. 몇 개의 땅은 사람들에게 기피 대상이 되고 황폐화 되며 전쟁에서 진 국가는 그 책임을 지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한다.

전쟁쓰레기는 그런 무겁고 진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 않다. 전쟁을 겪는 국가는 국가 대로 책임을 지겠지만, 개인은 다르다. 그 나라의 국가와 국민은 결국엔 분리되어야 한다. 유안은 딱히 아무런 짓을 하지 않았다. 전쟁에 나가고, 포로가 되고 그 벌로 감시를 받으며 살아가고, 결혼하고, 손녀가 자라는 것을 보며 한국 전쟁에 대한 것을 잊었다 싶을 만큼 편안하게 지냈다.

전쟁은 분명 국가 간의 일이지만 개인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개인이 전쟁을 겪고 나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개인의 문제다. 유안보다 못한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고 유안보다 훌륭한 일을 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국가가 개입하여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전쟁에 대한 것은 개개인이 알아서 판단해야 한다, 전쟁쓰레기는 그런 점을 매우 잘 보여 주는 책이다.

황천길 한 갑 주세요, 뭔가 찝찝하잖아

 

 

 

500원에 사먹고 있는 음료수는 원가가 100원을 넘지 않는다. 나머지는 유통 값과 소매상들의 이윤, 그리고 세금이다. 유통 값과 이윤을 빼고 나면 얼마 남지 않으니 세금도 크게 붙어있지 않다. 그에 비해 담배는 값의 62%를 세금으로 걷고 있다. 그런데 정부는 201611일부터 담뱃값을 2000원 더 올리겠다고 발표했다.

2006년 노무현 정부시절, 500원 인상에 대하여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소주와 담배는 서민이 애용하는 것 아닌가. 국민이 절망하고 있다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런데 당선 후 일 년 반 만에 그 말을 바꿨다.

흡연율을 줄이기 위한 정책. 담뱃값 인상에 대해 정부가 내세운 이유다. 하지만 복지부에서 발표한 설문조사는 흡연율을 줄인다는 이유의 근거가 되지 못했다. 금연자들의 대부분이 자신의 건강, 혹은 가족의 건강을 위해 금연을 했다고 답했다. 담뱃값이 올랐기 때문에 금연을 시작했다는 것은 아니다. 담뱃값이 오르면 흡연율이 줄어든다는 결과는 어디서 도출된 결과인가.

담뱃값이 인상되어도 결국 피울 사람은 피운다. 피우는 양이 적은 사람들은 4500원이 되어도 큰 부담이 없으니 양을 줄이지도 않고 늘 피우던 데로 피울 것이다. 그리고 많이 피우던 사람들도 처음엔 금연을 해보겠다고 하나 나중엔 4500원이라는 금액에 익숙해질 것이다.

현재 담뱃값의 916원은 지방세로 쓰인다. 담배를 피울수록 세금이 증가해서 인구수가 적은 곳에서는 담배의 세금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 국민의 건강을 위해 인상한 돈이 결국 지방세가 되어서 오히려 더 사서 피워야 지방 살림이 좋아지는 진다. 따라서 국민 전체가 금연하면, 오히려 국가의 재정이 위험해 진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국민의 건강 증진이란 표어를 걸고 담뱃값을 인상한 정부를 신뢰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담배 갑은 다른 나라의 담배 갑보다 멋있어 보인다. 그래서 중고생들은 멋으로 피우기도 한다. 다른 나라의 담배 갑은 정부에서 디자인을 하고 있다. 그래선지 담배로 생기는 병들로 죽어간 사람들의 사진을 모자이크나 흐림 효과 없이 담배 갑에 새겨 넣었다.

어느 네티즌이 이런 댓글을 남긴 적이 있다. ‘담배 이름이 너무 예쁘다. 타임. 에쎄, 레종. 클라우드이런 감성적인 이름 말고 폐암말기, 황천길, 호흡곤란, 뭐 이런 자극적인 이름을 써야 경각심이 생기지. 슈퍼에서 폐암말기 한 갑주세요뭔가 찝찝하잖아웃음이 터지지만 맞는 말이다.

미국에서는 편의점에서 담배판매를 중지한다고 한다. 미국 담뱃값은 20142월 기준 4.35달러다. 거기다 지금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담뱃값으로 인한 수익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상당히 높을거라고 예상한다.

OECD 국가 중 한국은 최저의 요금으로 담배를 살 수 있다. 청소년들의 접근성도 쉽다. 청소년들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담배를 산 것에 대해 벌을 받지 않는다. 판매자가 벌을 받을 뿐이다. 벌을 받지 않으니 청소년들의 접근이 쉽다. 다른 나라의 경우 판매자가 아닌 청소년 본인, 혹은 부모가 벌을 받는다. 일본의 경우엔 성인 인증을 판매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스스로 성인인증을 한다. 내가 담배를 살 수 있는 나이라는 것을 자기가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정부는 국민의 건강증진을 위해서 담뱃값을 인상한다고 했다. 하지만 서민의 애용품이라하여 500원 인상조차 성명서까지 내며 반대했던 이들이 내건 건강증진은 그냥 세금을 더 걷겠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정부가 정말 국민건강을 위했더라면 미국처럼 접근성을 줄인 후에 했어야 옳다. 미국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우리나라만의 방법을 찾아도 됐을 것이다. 다른 나라의 성공한 정책이 있는데 우리는 우리만의 정책을 만들지 않고 그저 옛날에 실패한 정책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네티즌의 말은 솔직히 허황된 것이다. 담배의 이름은 담배회사에서 정하는 것이니 수익을 올리려면 그런 멋에서라도 기대야한다. 하지만 정부가 건강증진이라는 표어를 내걸며 담뱃값을 올린 이상, 그런 허황된 말에서 구체적인 방안을 찾아야 한다. 적어도 너무 많은 디자인을 내걸며 청소년이나 보통 사람들에게 멋있어 보이게 끔은 만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나무'를 심는 토양을 비옥하게, ─ 『미학 에세이』

 

 

   구성주의 교육이론의 이론적인 가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인간은 세계를 이해하며 나름대로 구성하는 존재라는 것. 둘째, 인간의 활동이나 행동은 사회와 문화적 맥락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고, 그 영향으로 얻은 '지식'을 몸에 축적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구성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학습이란 자신의 세상에 대한 지식을 재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해서 '세계관'을 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나름대로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의 세계관을 쌓아 올리는 존재이다. 이는 예술에 탐닉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예술은 작가라는 한 인간이 '세계를 이해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사회적인 사건이나, 마음을 울릴만한 자연 경관을 보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글, 그림, 영화와 같은 '형태'로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한 작품은 그 작가의 세계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간혹 '순수'라는 말을 달고 나오는 예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 순수한 감정상태, 자연경관 등을 '그렇게 본' 작가의 생각이 있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작가의 우주, 즉 작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은 그것을 보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느낌만으로는 작품을 정확하게 이해 할 수 없다. 그들이 작품을 창작할 때 기반이 되었던 토양을 조금이나마 알아야지 그 '느낌'이 왜 그랬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영화 『판의 미로』의 괴물이 스페인의 화가인 고야의 '아들을 먹는 사투르노'에서 따왔다는 것을 알면, 그 괴물에게서 느껴지던 '불쾌함'과 '무서움'의 실체를 어느정도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러한 '이해'를 위해서는 정확한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 그림을 볼 때 마다 그 그림에 무슨 '이론'과 '사상'이 적용됐는지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림이나 예술을 보기 전에 미리 맥락을 짚는 일은 가능하다. 바로 '독서'를 통해서다.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에는 예술과, 거기에 영향을 준 이론들이 정리되어 있다. 한 분야에 국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 비극, 죽음, 분변증, 성과 육체의 예술 등, 여러 항목에 대해 총체적으로 정리한 에세이집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에세이 라는 말이 불어에서는 동시에 '시도'를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본격적으로 미학적 사유를 특정한 방향으로 발전시키기 전에 먼저 가벼운 글로 앞길을 타진해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라고 말한다. '미학적인 사유'의 전 단계인 '느낌'에서, 그 느낌에 기초가 되는 이론을 묶어 냈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이『미학 에세이』란 책은 읽기 편한 문장으로, 이론들을 우리의 세상에 기초해서 설명한다. 읽기 편한 글로 되어 있고 자칫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주제 또한 가볍게 읽힌다.

   구성주의 교육이론에서는 실제적 맥락이 강조된다. 지식이 실제로 사용되는 분야에서 유리되어 학습된다면, 지식은 비활성적인 지식으로 바뀌며, '학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미학 에세이』는 잘 쓰여진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을 소개하고, 그 이론에 대한 저자의 견해와, 실제적인 경험, 사회적인 현상 등을 소개하고 결론을 내리는 구성이며, 이 구성과 저자의 결론이 명쾌하기 때문이다.

    예술을 이해하는 것은 나무를 기르는 것과 같다. 토양은 사전 지식과 이론적 교양이다. 토양이 좋지 못하면 나무가 잘 자라지 않듯, 기본적인 교양과 사전적 이해가 없다면 예술에 대한 이해 또한 '작은 나무'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작가와 나란히 서서, 그 사람이 경험했던 '우주'를 자신의 눈으로 보고 이해하고 싶지 않은가. 작가의 우주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 또한 '스펙터클'한 경험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훌륭한 거름이다.

김려령 『너를 봤어』 서평

  

 

 

김려령 너를 봤어서평

 

    어느 시대의 어떤 사회에서든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계속 상처를 받으면서 살아간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살아간다. 이것은 어떤 식으로든 타인과 관계를 맺고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것은 죄의식으로 남지만, 다들 숨기거나 모른 척 하려고 애를 쓴다. 특히 현대에 와서 그런 경향은 심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프다. 김려령 작가는 바로 이러한 점에 눈을 둔다.

   김려령 작가를 알게 되었던 완득이라는 작품도 위와 같은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완득이에 등장하는 완득이의 아버지와 어머니, 완득이 등 많은 인물들이 모두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다만 완득이는 많은 상처 중에서도 청소년의 현재 진행형 상처가 중심인 이야기이다.

   이에 비해 너를 봤어는 청소년의 시기를 지난 성인들의 이야기다. 역시 이 인물들도 각자의 상처가 있는 인물들이다. 상처 중에는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어온 것들도 있는데, 주인공인 정수현과 그의 아내가 가진 상처가 그렇다. 둘의 결혼은 처음부터 또 다른 상처를 만들게 될 것이라고 예견되어 있었다. 서로에 대한 사랑도 별로 없었을 뿐 아니라 둘의 상처가 컸다. 아내는 어렸을 때 집안과 관련된 상처를 겪어오면서 날카로워졌다. 또한 수현은 어릴 적 폭력을 겪어 마음 속에 상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해 죄를 저질렀다. 그러나 밝혀지지 않아 수현의 마음속에 계속 자리 잡고 있게 되었다. , 상처와 죄의식 두 가지를 항상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연령대가 다르지만 완득이너를 봤어의 상처에는 닮은 부분도 있다. 그것은 둘 다 가족과 관련된 상처를 이야기의 중심으로 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상처들이 여러 사회문제들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도 닮은 부분 중 하나이다. 완득이는 다문화 가정 문제와, 너를 봤어는 가정 폭력과 접점이 있다. , 작가는 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공동체라고 부르는 가족과 연관된 사회문제를 주로 다룬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사회의 가장 밑에 깔려 있는 상처에 관심을 두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너를 봤어를 읽을 때는 인물들의 상처를 살피는 것도 좋지만 문장에 신경을 쓰면서 읽는 것도 해볼 만하다. 이 책을 이루고 있는 문장들은 책의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등장인물과 닮은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화자는 주인공인 정수현이지만 자살한 아내의 환영을 그가 보고 있을 때나, 아내의 과거를 말할 때는 날이 서있으면서도 동시에 고요했던 아내의 분위기와 닮은 문장을 내뱉는다. 마치 아내의 혼에 홀려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아내보다 늦게 찾아온 첫사랑이라고 한 영재에 대해 말할 때는 영재가 가진 특유의 발랄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인물들이 내뱉는 말들이 그들을 닮아 있다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문장의 분위기가 휙휙 바뀌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 오히려 가끔씩 섬뜩하기도 하다.

   『너를 봤어는 청소년 소설을 주로 쓰던 김려령 작가가 처음으로 쓴 19금 소설이다. 폭력과 성적인 부분 모두 수위가 높아서 자극적이기도 하다. 심지어 살인까지 나온다. 또한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다루고 있다. , 통속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다른 통속적이기만 한 소설과는 다르다.

   앞에서 김려령 작가는 현대인들이 가진 상처에 주목한다고 했다. 어떤 대상이 가진 상처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그 대상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너를 봤어의 자극적인 요소들은 인물의 상처를 부각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화제를 만들기 위해 인물들의 상처를 만들어 내거나 자극적인 요소를 집어넣는 것하고는 굉장히 큰 차이다. 인물들과 닮은 문장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작가가 가진 사랑 덕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맨 뒤에는 김려령 작가가 소설을 쓰게 된 동기가 밝혀져 있다. 사람을 죽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죽이고 싶은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의 살인 충동이 아니다. 작가가 실제로 죽이고 싶었던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진 상처와 그 상처로 일어나는 모든 슬픈 일이었을 것이다. 살인과 폭력이 작품 전반에 들어가 있어도 무섭지 않은 이유다.

 

'삼성'의 게임단 지원에 관한 단상.

 

 


  10월 19일. 나는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 있었다. 넓게 펼쳐진 잔디밭에서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결승전 개막을 알리는 카운터가 울렸고, 나는 숫자를 세었다. 내 주위 모든 사람들이 그러했다. 하나의 목소리가 '일'을 외쳤을 때, 전용준 캐스터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전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롤드컵'이 열린 것이다.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부스에 들어가자, 이매진 드래곤즈가 등장했다. 그들은 테마곡인 'warriors'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큰 소리였다.

   'Warriors'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늘 생각했던 거지만, 이 노래 가사는 제법 한국 E스포츠 판과 닮아 있다. 특히 중간의 코러스가 "Here we are, dont turn away now, We are the warriors that built this town. Here we are, dont turn away now, We are the warriors that built this town. From Dust." 라고 웅장하게 부르는 부분이 그러하다. 'Warriors'에서는 '우리'는 '먼지 위', 즉 아무 것도 없는 기반 속에서 도시를 건설한 전사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저 '게임'이었던 것을 '스포츠'로 발전시키고 향유하고 있는 E스포츠 계를 말하는 것 같다.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롤드컵의 테마곡이 이 곡이었던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11월 24일에 데일리 E스포츠에서는 '삼성 게임단의 아쉬운 행보' 라는 타이틀로 기사를 냈다. 삼성 갤럭시 게임단에는 프론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지원이 충분하지 않았으며, 세계 최고의 팀이 공중분해 된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첫 문단부터 마지막 문단 까지 공감이 가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먹먹했다. E스포츠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 들었고, 삼성 갤럭시 선수들이 잡음이 많았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만 같았다.

   블루와 화이트를 합쳐서 열 명. 그 열 명 중에 삼성에 남은 선수는 아무도 없다. 아무리 매 시즌 화려하게 리빌딩을 하는 팀이 많다지만, 이 정도로 리빌딩이 된 적은 없었다. 삼성 또한 먼지가 되었고, 그 위에 다시 빌딩을 '쌓아 올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롤드컵에서 형제팀이 나란히 1, 4위를 하던 그 순간도 이제 어제로만 남게 되었다. 선수 한 명도 잡지 못했다는 것은, '삼성'이라는 국내 대기업에서 활동하는 것 보다 다른 쪽의 제안이 '이득'이었다는 소리거나, 삼성에 잔류하고 싶은 마음이 없을 정도로 선수 케어가 안 됐다는 소리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에게 시드권을 왜 줬는가, 하는 의문이 제시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곧 있을 롤챔스 스프링 리그에서 선수가 모두 이탈한 삼성과, 가장 최근 성적이 안 좋았던 CJ에게 시드권을 지금한 것은 대기업 스폰의 '안정성' 때문이라고 한다. CJ는 꾸준히 성적을 내 왔고, 선수들 또한 멀쩡하게 소속되어 있다. 그러나 삼성은 성적은 내왔지만 그 성적을 내던 알맹이들이 사라진 상태다. 알맹이 없이 겉 껍질만 있으며, 12월에 열린다는 시범리그에서 '쓸' 선수 또한 '모집중이다'는 말만 하고, 선수 케어가 전혀 안 되고 있는 삼성이 시드권을 받을만 했는지는 의문이다.

   삼성 게임단을 소개하는 삼성 스포츠단 홈페이지 에는 삼성 갤럭시 E스포츠단의 링크가 없다. 삼성전자 칸 홈페이지 또한 먹통이다. 삼성칸 홈페이지는 멀쩡히 존재하던 것을 링크수정과 롤팀 통합의 이유로 내려놓았다곤 하는데, 이런 상황에선 삼성이 언제 손을 때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스타크레프트 2의 삼성 소속 선수인 송병구는 이번 시즌을 선수이자 플레잉코치로 뛴다고 한다. 선수 출신 코치로써 코칭에만 전념하는 것이 아니다. 송병구 선수는 '선수'이자 '플레잉코치'이다, 곧 이러한 감독 부재의 상황에서 '감독'이라는 감투까지 쓰게 될 것이 자명한 일이다. 무리한 인력 감축이라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이 과연 옳거나 좋은 일일까?

   이런 면을 볼 때, 삼성이 곧 E스포츠에서 손을 땔 거란 유언비어가 돌아다니는 것도 무리가 아닌 상황이다. 지금의 삼성 갤럭시를 보면 IM을 스폰싱하다가 돌연 스폰싱을 중단한 LG의 사례가 떠오른다. 부디 삼성은 그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시드 선발전이 끝나고, 곧 12월 시범 리그가 출범할 것이다. 삼성은 아직 누구를 뽑았다는 확정적인 사실도 말해주지 않는다. 곧 스타크레프트 프로리그 또한 개막할 것인데, 시청자의 입장에서 불안하기만 하다. 지금 삼성 게임단은 먼지 위에 있다. 그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삼성은 다시 '도시'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삼성 왕조의 끝을 보여줄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다시 한 번 삼성이 롤드컵의 주인이 되려면, 혹은 프로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리려면 프론트가 제 일을 확실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 왕조'가 역사 뒤안길로 사라진 망한 왕조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욕망이라는 가면은 진실을 헤집고. ─ 테네시 윌리엄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처음 접한 것은 일본 작가인 온다 리쿠의 소설 초콜릿 코스모스에서였다. 여주인공 두 명이 오디션을 보는 장면이었는데, 9장을 블랑쉬의 1인극으로 개작하여 한 명이 연기하고, 다른 한 명은 블랑쉬의 그림자를 연기하는 장면이었다. 그 소설을 읽은 지 한참이 지났어도, 여주인공 교코가 불 켜지 말아요!’ 라고 외치던 장면을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친다..

 

소설 자체의 상황이 급박했었던 것도 있지만, 여전히 그 대사가 생경하게 다가오는 것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대사가 훌륭했기 때문이다. ‘불 켜지 말아요는 블랑쉬가 미치나 스탠리에게 보여주었던 허울을 완벽하게 벗겨내는 대사이다. 폭로의 끝이며 그 때까지 쌓아왔던 블랑쉬라는 여자의 자존심마저 무너트리고 파멸하게 만드는 대사이기도 하다.

 

 

블랑쉬 :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거죠?

미치 : 당신 얼굴을 확실하게 보려는 거요!

블랑쉬 : 물론 나를 모욕하려는 뜻은 아니겠죠?

미치 : 아니요, 그냥 사실 그대로를 보자는 거죠.

블랑시 : 사실주의는 싫어요, 나는 마법을 원해요! 그래요, 그래, 마법이요! 난 사람들에게 그걸 전해주려고 했어요, 나는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지 않아요.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진실이여야만 하는 것을 말해요, 그런데 그게 죄라면 달게 벌을 받겠어요! 불 켜지 말아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1장으로 이루어진 희곡이다. 그러나 이 희곡의 백미는 위 대사가 나오는 9장이라고 할 수 있다. 9장을 분기점으로 하여 블랑쉬는 급격하게 몰락해간다. 어둠 아래에서 가려왔던 진실을 들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 켜지 말아요!’라는 대사는 직접적인 대사가 아니라 간접적인 대사이다. 은 그녀가 그동안 블랑쉬로써 존재하기 위해 지켜왔던 모든 것들을 파괴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진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희곡이기 때문에, 좋은 점을 말하려면 끝도 없지만 이 희곡은 가장 대사의 힘이 강한 희곡이 아닐까 싶다. 대사는 상징을 동반하고, 돌아가는 상황을 임팩트 있게 전개한다. 그러나 이는 직접적으로 대변되는 것이 아니다. 전등갓을 가리는 암시에서부터 시작되어 극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폭발시킨 것이다. 대사 하나로 도화선을 만드는 능력에 감탄할 정도다.

 

아마 온다 리쿠가 초콜릿 코스모스에서 여주인공 두 명이 격돌하는 장면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9장으로 그려낸 것도 이와 같은 이유일 것이다. 진실을 밝혀내려는 미치와 거짓의 베일을 둘러 자신을 보호하려는 블랑쉬의 대립이 첨예하게 말로 드러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소설 내에서 1인극으로 개작해서, 여주인공이 블랑쉬의 대사만 반복해도 무게감을 가지는 이유는, 대사 하나하나에서 불을 켜지 말라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불안감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이란 것은 참 신기하다. 말의 표면으로 좋다는말을 하면서도 상황에 따라서는 싫다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비꼴 수도 있고, 전혀 아닌데 그런 척 말을 내뱉을 수도 있다. 불안감을 감추는 블랑쉬가 미치에게 침묵으로 일관한 것이 아니라 말을 계속 내뱉던 것도 이러한 말의 속성 때문이 아닐까. 말과 말 사이에서 느껴지는 심리적인 거리감도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블랑쉬는 과거 안에 사는 여자다. 그녀는 자신이 예전에 소유하고 있던 농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그 결과 공작새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꾸미고 거짓으로 단장하는 일을 서슴치 않아 한다. 그녀의 모든 삶은 허언으로 쌓여 온 결과이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격동하는 산업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된 인물상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블랑쉬가 의미하는 것은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녀가 가진 개인적인 상처를 가리고, 남 앞에서 '잘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명작' 반열에 든 작품 속 인물은 어느 시대에 가져다 놔도 이해할 수 있는 인물이다. 블랑쉬 또한 마찬가지다. SNS나 인터넷 상에서 자신의 허물을 가리고, 잘난 점만 과시하면서 생활하는 인물이 현대의 블랑쉬가 아닐까 싶다. 자신의 페르소나와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진실 없는 '가면'은 언젠가 깨어지기 마련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의 블랑쉬가 결국 그러했듯. 그녀가 꺼놓고 다니던 침실의 불은 '켜지기 위해' 존재했다. 어두운 곳에서만 만나던 연인은 밝은 곳에서 그녀를 보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극 초반 블랑쉬의 여정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가다가 묘지라는 전차로 갈아타서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극락이라는 곳에서 내리라고 하더군요". 이 말처럼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결국 '묘지'라는 이름의 전차로 갈아탈 수 있다. 여섯 블록이 지난 다음 '극락'에서 내리는 것은 결국 그 사람 혼자만의 '극락'에 당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진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현대의 '블랑쉬'들은 알고 있을까.

 

표절과 도작, 상처받는 것은 피해자뿐만이 아니다

 

 

 

소설 커뮤니티 사이트라고 한다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조아라라는 사이트이다. 가장 많은 유저수를 보유하고 있고 하루에도 수백, 수천 건의 다양한 장르의 소설들이 업데이트 되는 곳이다. 이곳은 선호작이라는 것을 도입하고 있는데 이 선호작 수가 많은 사람에 한해, 인기작가 타이틀을 주기도 하고 출판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종종있다.

 

조아라에서 요즘 가장 핫한 장르는 로맨스로 여기에 판타지가 겹쳐지고 상당한 필력이 갖춰진다면 투데이 베스트라는 상위권 작품으로 등록되기도 한다. 최근에 왕비의 밀실이라는 작품이 이 투데이 베스트에 올랐다. 로맨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고 지나가야 한다는 말이 농담 삼아서 나오기도 했다.

 

이 작품은 헨리 8세와 앤 볼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여자주인공은 앤 볼린의 사촌 여동생으로 가상의 인물이고, 남자 주인공은 스페인 출신의 미남자였었다. 세계사가 전공이라던 작가답게 역사적 고증은 물론 그 시대의 생활상도 생생히 그려내었다. ‘미친 필력이라며 팬 층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는 70편 가까이 연재가 되었을 때 터졌다.

 

BL이라는 장르를 아는가. BLBoys love의 약자로 남성과 남성을 로맨스로 엮는 소설과 만화 등을 일컫는 말이다. 이 장르도 요즘에는 당당히 한 장르로 인정받고 출판이 되기도 한다. 비주류와 사회적 시선이라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인기가 많은 작품은 일반적 로맨스나 판타지 못지않게 수익을 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는 samk, 쏘니 등의 작가들이 있다. 이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으로 이미 개인출판 또는 e-book 출간을 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작품왕비의 밀실이 표절을 했다.

 

BL이라는 비주류 작품이라지만 개인출판 혹은, 이미 e-book출간이 되어버린 것을 표절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마자 커뮤니티는 당연히 마비가 되었다. 왕비의 밀실작가는 그 작품을 좋아하고 팬을 자처했던 독자를 한 순간에 바보로 만들었다.

 

표절은 남의 저작물의 일부를 몰래 따다 쓰는 것을 말하고, 도작은 남의 저작물 일부 혹은 전부를 따다가 대강 고쳐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왕비의 밀실을 과연 표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왕비의 밀실은 한 작품만 따다가 만든 것이 아니다. 익숙한 말인 표절을 사용하긴 했지만, 작품을 읽다보면 인물과 상황만 조금 바꾸었을 뿐 대화내용은 단어나 조사를 빼고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절과 도작은 경계가 애매하다. 둘 다 남의 저작물을 가지고 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표절이라고 하거나, 도작이라고 하거나 그것은 보는 사람 가치관에 따라 정하는 것일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표절이든 도작이든, 그것은 피해자에게 가장 큰 상처다. 본인이 고생해가며 만든 저작물을 한순간에 도둑맞은 것이 첫 번째 이유다. 두 번째 이유로는 극성팬에게 있다. 표절작의 극성팬은 자신의 작가님을 감싸기 위해서 고작 그것가지고 쪼잔하게 군다며 오히려 피해자의 험담을 하기도 한다. 자신의 작품을 도둑맞고 그 이후 욕까지 피해자가 뒤집어쓰는 꼴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 작품을 좋아했던 사람들은 먼저 배신감을 느낄 것이다. 순수하게 좋아했던 그 작품이 표절작, 혹은 도작이라는 사실은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왕비의 밀실은 명백하게 도작이라고 생각한다.-하지만 도작보다는 표절이 익숙한 관계로 표절로 표기하겠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왕비의 밀실작가는, 독자에게 배신감보다 더한 상처를 주었다.

 

표절문제가 불거지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작가는 발뺌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죄해야한다. 그래야 독자들은 배신감을 느낄지언정 배신감 이상의 상처를 받지 않는다. 얼마나 인기를 얻고 싶으면 그랬겠냐며 동정을 하기도 하고 진심으로 사죄하고 새로운 작품으로 돌아올 때, 이번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고, 지켜보겠다며 일종의 응원을 보내기도 한다.

 

표절 문제가 불거지자 왕비의 밀실작가는 연재 중에 보이지 않았던 서브작가를 내세워 자신은 잘못이 없다며 발뺌했다. 70편 가까이 응원을 보내왔던 독자를 배신한 것은 물론, 독자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만들었고 상처를 줬다. 지금까지 작가가 독자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드러난 것이다. 얼마나 쉽게, 그리고 만만하게 보았으면 표절 피해자가 사과를 요구하고 나서야 사죄문이랍시고 서브작가를 내세웠을까. 이미 표절로 인해 배신감을 느낀 독자가 그 서브작가의 실체를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표절 피해자는 작품을 도둑맞은 사람뿐만이 아니다. 그 작품을 좋아해준 사람까지도 피해자라고 볼 수 있다. 의도치 않게 표절을 했다 하더라도 피해자나 독자에게는 상처다. 자신을 믿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런 책임감 없는 짓은 하지 말아야한다. 정말, 아이디어가 겹쳐 의도치 않은 표절이라 하더라도 사과를 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야 옳다.

 

아울러, 왕비의 밀실의 작가도 성인다운 책임감을 발휘했으면 좋겠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서브작가의 탓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 작품의 작가로서 책임을 지고 일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래야 더 이상 표절이 외면하면 넘어가게 되는 그런 무른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아이디어가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시대인 만큼, 표절은 민감한 문제이니 이번 사건을 올바르게 마무리지어 다른 작가들에게도 경각심을 새겨주었으면 한다.